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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장 연옥 영혼에 대한 신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신심]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만덕을 갖추고 계신다. 그러나 눈물의 골짜기인 현세에서는 다른 덕, 예컨대 '공의'보다는 하느님의 인자하심이 보다 뚜렷이 드러난다. 연옥 영혼에 대한 신심은 우리로 하여금 이 하느님의 자비를 본받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하느님 뜻에 맞는 일이다. 왜냐하면 한시바삐 천국문을 저들 앞에 열어 주는 일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도와 드리고 그 협력자가 되기 때문이다.
성 토마스는 이렇게 말했다.
"거룩해진 한 영혼은 전 세계보다도 더 하느님께 영광이 된다."
연옥 영혼을 천국에 들여보내는 것은 이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할 사람을 늘이는 일이다.
이렇게 한다면 심판 때에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5, 7)라는 말씀은 즐겁게 우리 귀에 울리게 되리라.
성 비안네는 말한다.
"지극히 미소한 자인 우리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음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냐."
[교회의 가르침]
죽은 이의 운명에 대하여 교회는 우리에게 명백하고도 위안이 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즉 "죽은 이의 생명은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변화할 뿐이다. 영혼은 한때 육신과 헤어졌다가 세상 마칠 때에 다시 결합하여 영원히 하느님의 선미 선덕을 바라 보는 것이다."
또 교회는 연옥 영혼을 도와 주는 데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미사 성제, 성무일도, 장례 등 여러 가지 예식으로써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또 교회는 우리의 용기를 북돋우기 위하여 대단히 힘 있는 보호자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즉 천국에 있는 모든 성인, 천사의 으뜸인 성 미카엘, 연옥의 주보인 성 요셉, 하늘의 모후이신 성모마리아는 우리의 기도와 고업을 하느님께 전달해 주는 것이다.
성녀 소화 데레사는 말한다.
"나는 죽는 것이 아니고 생명에 들어갑니다. 이승에서 당신들에게 말하지 못한 것을 나는 천국에서 당신들에게 깨닫게 해드리겠습니다."
[성인의 권고]
인류 중에서 선발된 성인들은 죽인 이의 영혼을 도와 주기 위하여 항시 분발하였다. 구약 시대부터 그러하였고 특히 유럽의 전란 후에는 도처에서 죽은 이를 위한 기도와 고업이 바쳐지고 있다.
19세기의 유명한 수사 미레리요 신부는 죄인의 회개와 연옥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전심 전력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자기와 마찬가지로 전교에 종사하고 있는 벗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무엇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나요? 천국을 위해서겠지요?"
"그렇고 말고요."
"나는 천국을 위해서는 일 안하오."
"그건 또 어째서요?"
"나는 연옥을 위하여 일하지요. 그리고 확실히 천국에 들여지리라 믿소. 나의 고행, 기도, 은사 같은 것은 모두 다 연령을 위하여 바칩니다."
우리도 이 훌륭한 신부를 본받자, 구원된 영혼은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 천국에까지 우리를 인도해 줄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요체]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연옥 영혼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와 희생을 바치며 가난한 이에게 자선하는 것보다 더 고상하고, 교회의 신심으로서 이 보다 적합한 일은 많지 않으리라."
연옥 영혼에 대한 신심 중에는 자연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초자연적인 것이다. 그들의 영혼의 고통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다만 신앙으로 이를 알 뿐이다. 사람도 우리의 기도와 고행을 모른다. 그것을 아는 분은 하느님 뿐이다.
유명한 신부 페버는 말한다.
"연옥 영혼에 대한 신심은 초자연의 중심이다. 다른 신심은 모두 그것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조제프 드 메스트르는 말한다.
"연옥은 상식중의 하나이다. 계시로만이 아니라 이치로도 알 만한 진실한 조항이다."
[크나큰 위안 - 오자남의 편지]
19세기의 이름 높은 문학자요. 자선가였던 오자남은 모친의 죽음을 당하여 어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슬픔에 겨워 나는 위로를 받을 수 없었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점점 시일이 지나가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내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곁에 계신다고 깨달으니 옛날 그 발소리와 목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무슨 좋은 일을 했을 때에도 어머님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눈물을 흘리더라도 그 속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평안함을 누립니다. 내가 선을 행할 때나 가난한 이를 도와 줄 때에는 어머님이 일심으로 사랑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고 나는 어머님의 미소를 봅니다. 기도할 때에도 어머님과 함께 십자가 아래 무릎 꿇었던 옛일을 회상하고 그 기도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 같습니다."
[아들을 만나러 간다]
아들은 임종이 다가오자 이 때까지 참아왔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불쌍한 어머니는 침대 곁에 앉았고 부친은 슬퍼하면서 방안을 왔다갔다 거닐고 있었다. 그 때에 나는 "하느님은 어찌하여 이 어머니 마음이 큰 상처를 입도록 그냥 두시는 걸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 나는 같은 방의 같은 침대에서 다 죽어 가는 이 불쌍한 어머니의 임종에 가서 여러가지로 위로하였다. 그러자 이 어머니는 "신부님, 나는 아들을 만나러 갑니다."라고 말하고 조금 후에 죽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2년 전에 몰랐던 수수께끼를 그제야 풀었던 것이다. 즉 "인간의 목적은 이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은 현세에서는 우리에게 만족을 주시지 않는다. 그리고 각가지 '공로'를 쌓게 하여 영원한 천국에서 즐기게 하시는 것이다."
[내 딸은 하느님을 보고 있다]
'투르의 성인'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뒤퐁은 19세기 중엽 아내를 잃고 외딸 브리에트와 함께 투르시에서 선업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딸은 열다섯 살이 되었다. 본시 타고난 우아한 덕에다가 두터운 신앙을 더하였으나 그 쾌활한 성격은 도리어 부친의 걱정거리였다.
"아아, 만일 저 애가 수녀가 되고 싶어한다면..."
부친의 최상의 소원은 이것이었다.
어느 날 부친은 나이 많은 수녀와 딸의 장래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이 귀여운 아이의 구령을 위하여 만일 수도원 하나를 지어야한다면 나는 내 손으로 땅을 고르고 돌을 등에 져서라도 갖다나르지요..."
딸의 나이가 많아질수록 부친의 걱정은 더할 뿐이었다.
"주여, 만일 이 애가 장차 바른 길에서 멀어질 양이면 세상의 덧없는 손에서 그 애를 빼앗아 당신 곁에 불러 주시기를 원합니다."
부친은 자주 이렇게 기도하였다.
그 후 딸은 감기가 들었다. 각가지로 약을 썼지만 병은 점점 중태에 빠졌다. 부친은 여러 수도원에 딸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를 청했으나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들어 주시기 않았다.
노자 성체를 영한 후 딸은 곁에 있는 수녀에게 뜨거운 신앙으로 말했다.
"수녀님, 어느 피정 때에 이 세상의 모든 보배나 보석 같은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비한다면 마치 돌과 같다고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 말을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아, 참으로 이 세상 보배가 무엇이겠습니까? 만물의 조물주이신 예수님만이 가치 있습니다."
침대 곁에 꿇어앉아 기도하고 있던 부친은 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예, 이 크나큰 위로를 받고 기쁘겠구나. 너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조금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겠지?"
딸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지와 헤어지는 것만이 마음에 걸릴 뿐입니다."
그래서 부친은 말하였다.
"너는 내게서 떠나는 것이 아니다. 너는 천국에서 하느님 곁에 있고 나는 이승에서 하느님과 함께 있다. 그러니까 둘이 한데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두 개의 장막이 우리에게 하느님을 숨겨 둔다. 네 장막은 조금 후에 찢어지고 내 것은 나중에 찢어지겠지. 그 때야말로 영원히 같이 살 수 있단다."
임종은 점점 다가왔다.
부친은 딸의 손을 잡고 감격에 넘친 신앙으로 말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여, 이 세상을 떠나라. 하느님을 거스르는 현세에 머물지 말고 천국에 가라. 죽음은 생명이요 세속은 죽음이다. 하느님 곁에 가서 '우리는 오로지 당신 뜻대로 따르겠나이다.'라고 말씀드려라. 진정 내 마음은 으스러질 만큼 슬픔에 잠겨 있다. 그것은 나는 지금 산고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천국을 위하여 너를 낳는다. 하느님 대전에서 먼저 나와 네 어머니를 위해 기도해 다오. 그리고 친척과 너를 가르쳐주신 수녀님들, 또 너를 갖가지로 돌봐 주신 분들과 네 동무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그리고, 잠시 묵묵히 있다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어릴 적부터 헌신적으로 돌봐 주시고 갖가지로 치료를 하셨지만 헛일이 돼 버린 존경하올 이 의사 선생님을 위해서도 기도하려라."
딸은 말없이 듣고 있었으나 깊이 감동된 듯이 끄떡였다. 모두가 눈물에 젖었다. 의사도 감동되었다. 그는 아무리 애써 봐도 그녀를 구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슬픈 경우에 부친을 위로하려고 그녀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곁에 서 있었다.
죽음의 고통이 시작되었을 때에 부친은 여전히 안온한 얼굴로 열심히 기도하였다. 숨이 끊어졌을 때에 부친은 천사가 아닌가 싶은 표정으로 의사를 보며 말했다.
"선생님, 내 딸은 하느님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자연적 기쁨에 충만하여 마니피캇(Magnificat, 성모의 감사노래)을 외웠다. 어떤 이는 이를 보고 상식을 벗어난 짓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의사는 신앙의 눈으로 보고 몹시 감동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야말로 신자의 이상입니다."라고 덧붙이는 것이었다.
"내 딸은 하느님을 보고 있다."는 두터운 신앙의 절규를 하면서 부친은 눈물로써 옆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에게 이 아름다운 슬픔을 전하며 말했다.
"우리는 희망 없는 사람처럼 슬픔에 잠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분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을 따르고, 마침내 천국에서 함께 있음이 인간의 목적입니다. 내 딸은 그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어찌 슬퍼하겠습니까?"
딸을 관에 넣기 전에 부친은 팔짱을 끼고 그 옆에 섰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망자의 얼굴을 보자 부친의 얼굴은 갑자기 변하고 북받치는 눈물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곧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기도하고 눈물에 젖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자칫하면 질 뻔했어. 그러나 이제는 살아 있을 때보다 내 딸은 더 가까이 있다. 하느님을 가리고 있는 장막이 내게서 찢어지면 볼 수 있겠지."
그 때부터 부친은 하느님의 섭리에 완전히 맡겼다. 2층에서 관을 내릴 때에 이 훌륭한 신자는 관에 입맞추고 거듭 말했다.
"귀여운 내 딸아, 잘 가거라. 있다가 만나자."
기도하러 망자 곁에 온 사제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부친은 말했다.
"이 귀여운 아이는 세속과 싸워 이길 작정이었지만 질까 봐 도망을 쳐서 이겼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정원사처럼 당신 정원에 내려오셔서 이 아름답고 결백한 꽃을 보시고 그가 폭풍에 꺽이기 전에 꺽어서 천국에 들이신 것입니다. 내 슬픔은 큽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 모든 쾌락보다 더한 즐거움을 내 심중에 느끼고 있습니다. 딸은 천국을 위해 태어났습니다. 지금 거기 가 있습니다. 아비로서의 나의 의무는 수행되었습니다."
관을 무덤에 내려놓을 때에 부친은 그 위에 십자 성호를 긋고 벅찬 감격과 그러나 한결같은 훌륭한 신앙심으로 말했다.
"귀여운 아가, 잘 가거라. 천당에서 또 만나자."
아아, 죽음은 다만 낮잠에 지나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던 시체가 태양처럼 빛날 때가 온다. 죽은 이와 우리의 인연은 안 끊꼈다. 우리는 항상 이를 돕기 위하여 기도하면 된다.
[안심할 수 없는 최후]
회개할 겨를이 없이 죽는 사람의 구령은 어떻게 될까? 이는 우리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다. 마음가짐 하나만으로도 하느님의 자비를 얻기에 넉넉하다.
단테는 '신곡'에서 말한다.
"모기 눈물만큼의 눈물로도 지옥에서 영혼을 구해 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니까 성 바오로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로마4, 18)라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인간 위에 일생동안 자연과 초자연의 은혜를 비처럼 내리셨다. 그 최후 순간에는 구속 사업이 헛되지 않도록 전보다 한층 더 힘을 기울여 이 불쌍한 영혼을 은총으로 비추시는 것이다.
인노첸시오 3세는 말하였다.
"모든 사람은 현세를 떠나 영원하신 심판자 앞에 나아갈 때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환상을 본다."
이때에 사람은 선과 악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이 때가 되면 이제까지 회개하기를 방해하던 육욕, 편견, 체면 같은 것은 아주 사라져 버린다. 그러므로 진리를 보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신의 배은 망덕을 깨닫고 완전한 통회를 하여 전날의 대죄인도 돌연 하느님의 사랑스런 아들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오른편에 못 박혔던 도둑의 회개는 그 확실한 증거이다.
사람이 임종하는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다 함은 성인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성 그레고리오의 백모 티르실라는 임종 때에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돌아가시오. 방금 예수님이 나를 마중 오셨습니다."
유명한 클루니 수도원의 수사 투르킬은 임종 때에 다음과 같이 말하며 숨을 거두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온순한 무리를 보았다."
같은 클루니의 수사 카르디날 마티아는 임종을 맞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밤에 죽은 이 가운데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대전에 나아가 성모님을 보았습니다. 나는 발 밑의 자리를 얻었습니다. 거기서 나는 영원히 쉬겠습니다."
성녀 제르투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일생 중에 때때로 나를 기억한 자나 혹은 선업을 한 자에게는 나는 그 임종 때에 나타나서 한없는 나의 친절과 사랑을 보여 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그것을 보고 마음속에 통회의 정을 일으켜 구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 아무리 구령이 의심스러운 경우일지라도 희망을 가지고 기도함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인자에 의합하는 일이다.
심장의 고동이 멎고 호흡이 끊어질 때가 육체와 영혼이 갈리는 때가 아니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겉으로는 아무런 '표'도 없다 할지라도 인체 조직 속에 생명은 남아 있다. 즉 숨은 생명은 긴 병을 앓고 난 뒤라도 적어도 1시간, 특별한 사변이나 즉사 때는 3시간에서 18시간, 또 때로는 수일간 계속된다. 그러니까 죽는이 곁에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고 그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이 동안 잠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좋다.
[철교에서 수면까지]
어느 날 한 귀부인이 슬퍼하면서 성 비안네에게 위로를 받으러 왔다. 그녀의 남편이 강에 뛰어들어 자살했기 때문이다. 신부는 자비스런 눈으로 이 부인을 바라보고 영감에 싸여 그녀에게 말하였다.
"철교의 난간에서 강물까지의 거리는 멀었습니다. 부인,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기도 많이 하십시오."
[성모께 바친 꽃]
어느 날 성 비안네 신부에게 낯선 부인이 울면서 찾아와서 말했다.
"내 남편은 별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종교 본분을 게을리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급환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구령이 의심스러워 무엇보다도 그게 슬픕니다."
그녀를 위로하여 말했다.
"그렇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부군께서 5월의 매주일 성모님께 꽃다발을 바치던 일을 잊었습니까?"
부인은 깜짝 놀랐다. 정말 그렇지! 이 5월에 남편은 주일마다 교회에 산보 나갔다가 돌아올 때에는 반드시 길가의 꽃을 꺾어와서 예쁘장한 꽃다발을 만들고 그걸 자기 집 성모상 앞에 바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걸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고 자기도 벌써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비안네 신부님이 아실까 하고 눈이 둥그레져서 대답도 못하고 있었다.
신부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하느님은 당신의 열심한 기도를 들어 허락하시어, 부군께서 꽃다발을 성모님께 바치고 공경하셨기 때문에 임종 때에 통회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구령에 대해서는 염려 없으나 빨리 연옥에서 구해 내기 위하여 기도와 선업을 하십시오."
[순명의 갚음]
어떤 신부는 자기 부친과 형이 믿지 않는 사람처럼 생활하는 것을 몹시 슬퍼하여 특별히 죄인의 구령을 위하여 힘쓰는 수도회에 들어갔다. 얼마 후에 사랑하는 부친과 그 형은 여행 중 배가 파선되어 익사했다. 이 신부의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구름에 휩싸였다.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며 고행, 선행을 하는 외에는 조그마한 마음의 위로도 얻을 수 없었다.
시일이 흘렀다. 그 동네의 어떤 병원에 다 죽어 가는 병자가 하나 있었다. 딴 신부가 몇 사람이나 불려 갔으나 병자는 그 권면을 듣지 않았다. 이번에는 아까 그 신부가 불려 갔다. 가 보니 죄 사함을 받기를 거부하는 그 병자는 죽었다고 생각한 자기의 형이었다. 그러나 병자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신부는 병자를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서 남인 것처럼 하고 마지막 준비를 권했다. 병자는 기진한 목소리로 간신히 "부친은 바다에 빠졌지만 나는 이러 이러하게 구조되었다."라고 거듭 뇌었다. 그러나 선종 준비를 하려 들지 않고 성사 받기를 거절했다. 신부는 슬퍼하면서 수도원에 돌아왔다.
신부가 수도원 문에 들어서자마자 원장은 그를 보고 말했다.
"지금 어느 동네의 묵상회에 가려던 참인데 모 신부가 급병이란 전보가 왔소. 내 대신 강론을 좀 해주시오."
순명 서원을 한 그 신부는 마음의 번민을 돌보지 않고 머리 숙여 승낙의 뜻을 나타내고, 가기 방에 들어가 십자가 앞에 엎디어 주님의 발에 입맞추며 눈물과 함께 형의 회개를 기도하고 이 비통을 희생으로 바치고는 짐을 챙겨 출발하였다.
그런데 그 동네에 도착하여 교회에 들어가니 지금 곧 고해 성사를 보고 싶다는 청년이 기다리고 있다고 알리는 것이었다. 그 본당 신부는 너무나 미안스러웠다.
"이건 너무 염치가 없습니다. 이제 막 오셨는데 좀 쉬십시오. 그 청년은 잠깐 기다리게 해도 괜찮습니다."
"염려해 주시는 건 고마우나 남자는 모두 참을성이 부족합니다. 내게 고해 성사를 보고 싶다는 그 초면의 청년을 기다리게 하지 맙시다. 아시는 바와 같이 청년의 고백은 짧습니다. 게다가 남의 죄를 사해 주는 것은 사제 마음에 가장 위로가 되는 일입니다."
함께 나란히 성당에 가서 고해소에 들어갔다. 그러자 청년은 근엄한 태도로 빛나는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신부여, 내가 여기 온 것은 고백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네게 큰 기쁨을 전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셨다. 그대의 형은 병원에서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너는 이것을 원망하지 않고 원장의 명령으로 여기 왔다. 그 희생은 크게 하느님 뜻에 맞았다. 그대가 십자가 아래 엎디어 그 발에 쏟는 뜨거운 눈물을 하느님께서 세어 보셨다. 이 비통한 경우에도 그대는 순명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위독한 상태에 있던 그 형은 특별한 은혜를 받아 훌륭한 준비를 하고 마지막 성사를 받았고, 그 영혼은 지금 연옥에 있다. 그대 부친은 파선 때에 죽었다. 그러나 그는 성난 파도와 싸울 동안에 통회와 신앙을 일으켰다. 이 은혜를 받을 수 있었음은 그대가 수도원에 들어가 밤낮으로 헌신적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부친의 영혼은 천국에서 그대를 위하여 자리를 준비하고 있다."
이런 말을 들은 신부는 놀라움과 기쁨에 충만하여 자기를 잊고 있었다. 여러 가지를 물어 보려고 하는데 이 이상한 청년은 사라졌다. 이 교회 사람들은 아무도 이 청년을 아는 이가 없었다. 또 아무도 그 뒤에 이 청년을 만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이 신부는 이는 부친이나 형의 수호 천사가 알려 준 것이라고 믿었다.
[영육 분리의 순간의 비밀]
하르트만 신부의 모친은 유대인이었다. 가톨릭 교회에 귀의하기를 완강히 거절하고 이승을 떠났다. 하르트만 신부는 몹시 슬퍼했다. 그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불쌍한 어머니는 죽었다. 어머니 구령이 몹시 걱정된다. 그러나 어머니의 회개를 위하여 내가 하고 또 남에게 청하여 바친 기도를 생각한다면 여기 희망의 빛이 생긴다.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순간 어머니와 하느님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겉모양으로 말할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깊은 인자에 매달릴 수 밖에 없다."
신부의 모친을 위하여 바쳐진 기도는 헛되지 않았다. 얼마 후 모친의 구령에 관한 기쁜 소식을 받고 안심하게 되었다.
하르트만 신부는 어느 날 프랑스 남쪽 아르스의 유명한 신부를 찾아가 영세도 못하고 죽은 모친의 구령을 걱정하였다. 그러니까 덕이 높은 신부는 대답하였다.
"희망을 가지시오, 희망을. 어느 해 성모 무염 시태 축일에 당신 모친의 구령에 대하여 큰 위로가 되는 편지가 올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이 하르트만 신부의 뇌리에서 거의 사라져 버렸을 만큼 세월은 흘렀다. 1861년 12월 8일, 즉 성모 무염 시태 축일, 모친이 영면한 지 6년째에 하르트만 신부는 예수회의 어떤 신부가 보낸 한 수녀의 편지를 받았다. 이 사람은 성체에 대하여 책을 쓰고 거룩한 선업을 행한 후 세상을 떠난 유명한 수녀였다. 그 수기는 다음과 같았다.
10월 18일, 영성체 후의 기도를 하는 내 마음은 주님의 현존에 잠겨 기쁨과 만족에 가득 차서 이제는 신앙도 필요 없을 만큼 깊은 영감을 받았다.
이렇게 친밀한 교재를 하느님과 맺는 동안에 전날 어떤 자매와 담화한 기억을 상기했다. 그 때에는 하르트만 신부의 기도를 왜 들어 주시지 않았나 하고, 자칫하면 하느님의 섭리마저 원망할 만큼 의론이 분분하였다.
"하느님의 깊은 뜻을 섣불리 추측하기보다는 그 섭리에 맡기는 편이 낫다. 하느님의 비밀은 사람의 힘으로는 알 수 없다."
자매에게 내가 이렇게 말했더니 자매는 참으로 그렇다며 납득을 했다.
그래서 오늘 나는 주계 여쭈었다.
"내 주여, 주께서는 자비의 근원이신데 왜 하르트만 신부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습니가? 왜 그의 모친에게 회개의 은총을 주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주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벗 안나는 어찌하여 내 정의의 비밀과 깊은 진리를 깨닫고 싶어하는가? 나는 아무에게나 은총을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대로 준다. 더욱이 그것은 정의를 거스르지 않는다는 것을 동무에게 알려 주어라. 내 영광과 남의 구령을 먹적으로 바치는 합당한 기도를 나는 언제나 들어 준다. 그 증거로서 하르트만 어머니의 임종 광경을 지금 네게 보여주리라."
그리고 내 지혜는 비춰져 기묘한 현상을 보았다. 병상에서 신음하는 하르트만 신부 모친이 죽을 때가 다가왔다. 그려는 단말마의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러자 성모는 성자의 발 앞에 엎드려 청했다.
"내 아들이시여! 이 불쌍한 영혼을 구해 주십시오. 이제 조금만 하면 이 영혼을 잃게 됩니다. 내 종인 하르트만을 대신하여 청하오며 당신 어미인 내 청이오니, 그에게 은혜를 베출어 주십시오. 이 죽어 가는 사람의 구령은 하르트만에게는 무엇보다 귀합니다. 그는 몇 천 번이고 나에게 이 빈사자의 회개 를 빌었습니다.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영혼은 내게 몇 번이고 봉헌되었습니다. 내 것입니다. 당신이 흘리신 성혈과 내가 십자가 아래서 받은 고통의 값으로 그의 영혼을 구해 주십시오."
성모님의 간청이 끝나자마자 온갖 은총의 샘이신 주님의 성심에서 구령에 필요한 은총이 나와 완고한 유대 부인의 지혜와 마음을 비추었다. 원고함과 장애를 이겨 낸 병자는 부르짖었다.
"예수여, 그리스도인의 하느님, 내 아들이 섬기는 하느님, 저는 당신께 신앙과 희망을 가지오니 저를 구해 주소서... ... ..."
빈사자의 마음속에서 용솟음쳐 나온 말은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기도 중에는 평소에 완강하게 온갖 권고를 물리치고 회개하지 않았던 것과 본죄에 대하여 통회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신, 망, 애의 마음이 이 영혼의 최종 상태였다. 마음속으로부터 이 뜻을 표하고 무한한 자비의 샘이신 하느님을 대하였다. 그리고 눈을 감자 곧 지극히 높으신 심판자 앞에 나아가 그 영혼은 엎디었다.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하르트만 신부에게 말하라. 이는 그가 어미의 구령을 위하여 오래도록 고통을 참아 받은 갚음이라고, 또 내 어머니의 성심의 깊은 자비와 내 마음에 있는 위력을 보고 내 어머니께 감사드리고 또 남에게도 감사드리게 하라."
[결투자의 구령]
17세기에 성모 방문회에 겸손하고 여러 가지 덕에 뛰어난 성인과 같은 인생을 보낸 마리 말티기아라는 수녀가 있었다. 그녀는 속세에 있던 시절에는 '궁정의 꽃'이라고 불리었던 궁녀였다. 수도원에 들어간 후로는 기도와 극기로 명성이 높은 수녀였다. 어느 날 말티기아는 하느님의 묵시로 사보이 국의 궁정에 있었을 때에 잘 알고 있던 황족 샤를 아마데우스 느무르 태공이 그 의제와 결투하다 상대방 칼에 찔려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원장은 이 말을 듣고 태공의 구령을 의심하였다. 그러나 말티기아는 말했다.
"임종 때에 태공의 지혜는 은총에 비춰져 번갯불이 번쩍할 한 순간에 통회할 수 있었습니다. 결투하는 자는 영원한 죽음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태공을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친 어떤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정의는 달래지고 그 자비로 구원되었습니다."
[엑세크망스 원수]
드 라비냥 신부의 의형제 엑세크망스 원수는 수계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말에서 떨어져 즉사했다. 전에 고해 성사를 보기로 약속을 하고 있었으나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 날 영감을 받고 있던 한 사람은 심중에 다음 말씀을 들었다.
"나의 자비 갚음을 누가 깨달을 수 있으랴. 바다의 깊이와 또 거기 가득히 찬 물을 아는 자 있는가? 사람이 모르는 사람들 중에 용서함을 받는 영혼은 많이 있다."
[오클레앙 공작의 즉사]
국왕 루이 필리프의 장남 오플레앙 공작은 무서운 마차 사고의 희생자가 되었다. 신심이 깊은 마리아 아멜리아 모후는 아들의 영혼 사정을 생각하고 못내 슬퍼하였다. 그리고 드 라비냥 신부에게 그 슬픔을 호소하였다. 사제는 말하였다.
"이승의 마지막 호흡을 할 때에 하느님의 은총과 사람의 영혼 사이에는 조그마한 장애도 없습니다."
[사형수의 십자가 친구]
소화 데레사는 그 자서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쓰고 있다.
"어느 날 나는 브란지니라는 대죄인이 여러 가지 중죄 때문에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그래도 통회의 정을 일으키지 않고 영원한 벌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 불쌍한 최후, 되물릴 수 없는 불행한 길에 들어가는 부랑한 영혼을 도와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여러 가지로 그 수단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한하신 공로와 모든 성인의 공로를 빌려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이 청을 반드시 들어 허락하시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다른 불쌍한 영혼을 위해 기도할 생각이었으므로 용기를 얻기 위해서 이렇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주여, 저는 주께서 불행한 브란지니의 죄를 용서해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설령 그가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고해성사를 보지 않고 또 통회하는 표시도 보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저는 주님의 무한하신 인자를 깊이 믿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를 용서해 주시리란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하오나, 이 사람은 저의 첫번 죄인이오니 저를 위로해 주시기 위해서 그가 통회했다는 표 하나만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내 기도는 허락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절대로 우리에게 신문을 읽게 하지 않으셨지만 이 브란지니의 기사를 본다고 아버지 명령을 거스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어서 그의 사형 집행 이튿날 급히 라 크루아 신문을 펼쳐 봤습니다. 그랬더니 다음 기사가 나와 있었습니다.
'... ... ...이 브란지니는 고해도 하지 않고 교수대에 올라갔으나 형리가 막 그 목숨을 끊으려고 할 때에 어떤 영감의 충동을 몹시 받은 것처럼 갑자기 머리를 돌이켜 신부가 곁에서 받들고 있던 십자가를 바라보더니 부리나케 이를 빼앗아 들고 세 번 손과 발의 거룩한 상처에 입맞추었다... ... ...'
나는 이것을 읽고 얼른 그 자리에서 달아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깊은 감격에 넘쳐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깊이 감사하였습니다."
[실망해서는 안 된다]
백 년 전 파리의 유명한 수녀원에 한 수녀가 있었다. 그녀는 유대인의 피를 받았으나 덕과 지식의 뛰어남은 이 수녀원에서 첫째로 꼽히었다. 양친은 순수한 유대인이라는 것 외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 하여튼 그녀는 스무 살 쯤에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모친은 유대교의 열심한 신자일 뿐더러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현모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딸이 유대교를 버리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는 말을 들은 모친의 노여움은 대단하여, 사랑의 반동에서 야기된 협박적 방해의 화살을 자기 딸의 몸에 마구 쏘아 이 유대교를 버린 딸을 되찾아 오려고 갖가지로 책략을 꾸미고 있었다. 영세를 한 지 아직 얼마되지 않은 딸은 열심으로 어머니의 회개를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쳤다. 그러나 그 효과는 조금도 없었다. 딸은 결심을 굳게 하고 어머니의 회개를 위해 헌신하려고 25세 때에 수녀원에 들어갔다.
"부모의 마음을 자식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으나 딸의 마음을 어머니가 몰라주어 딸이 진심을 다하면 할수록 어머니의 분노는 더하였다. 이 심전은 20년간 계속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머니의 노여움도 약간 풀리고 딸도 이따금씩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의 속마음은 알 수 없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딸의 정성도 아무런 보람이 없어 보였다.
이 효성스러운 딸에게 어느 날 "모친이 갑자기 죽었다."는 슬픈 소식이 왔다. 딸은 비통함에 미칠 것같이 되어편지를 움켜줘고 성당에 들어가 성체 대전에 엎디어 울었다. 그리고
"내 주여, 제가 20년 동안 어머니의 회개를 위하여 뜨거운 기도를 바치고 눈물을 흘린 갚음이 이 소식입니까?"
하면서 이 때까지 해 온 고업들을 늘어놓고 몸부림치며 애통하였다.
"이런 일들이 아주 허탕이 되고 어머니는 지옥에 떨어졌다!"
이상도 하다. 감실 속에서 좀 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네 어머니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느냐?"
그녀는 위엄에 눌려 엎드렸다. 그랬더니 또 소리가 들렸다.
"너의 불신앙을 책함과 동시에 또 너를 위로해 주리라. 네가 어미의 구령을 위해서 이 때까지 한 일 때문에 네 어미는 임종의 고통 중에 '하느님, 저는 회개하겠사오며, 제 자식이 받드는 종교를 희망하나이다.'라고 마음속으로부터 통회하고 세상을 떠났다. 네 어미는 얼마 동안 연옥에 있으니 영복을 얻도록 너는 항상 기도해 주어라."
이 수녀의 오랜세월의 슬픔의 눈물은 곧 기쁨의 눈물로 변하고, 그녀는 하느님께 깊이 감사하였다.
[단정할 수 없다]
여기서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어떤 희생이 아직 바쳐지기 전에 또는 못다 바쳐졌을 적에 어떤 이가 죽을 경우에는 구원될 수 없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럴 때라도 우리는 계속 희망을 가져야 한다. 모든 성인의 통공과 하느님 안에서는 과거도 미래도 없고 모두가 현재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참아 받은 간난이나 기도의 공로를 보류하실 뿐만 아니라 아직 실행되지 않은 선업이나 고행도 예지하시어 은총을 내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교회의 성사를 못 받고 이미 세상을 떠난 부모, 형제, 벗들의 구령을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것은 헛수고가 아니다. 이는 진정 우리의 깊고 거룩한 사랑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미래에 행해질 예수그리스도의 구속 공로로 말미암아 성모마리아를 원죄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예수그리스도는 성녀 제르투르다가 나중에 바칠 기도 때문에 죄인에게 회개의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친히 성녀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하느님의 정의 쪽만 보고 모든 사람을 지옥에 떨어뜨린다 하고, 어떤 이는 하느님의 사랑만을 보고 모든 사람을 천국에 올려 준다 한다. 그러나 양쪽이 다 틀린 단정이다.
몇 해 전 파리의 어떤 집 아들이 무서운 사정으로 하여 급사하였다. 모친은 실망한 나머지 이틀 동안 집안을 뒹굴며 '아아, 내 아들, 가엾은 내 아들이 지옥 불에 빠져 영원한 벌을 받는구나." 하고 울부짖어 보기에도 처참하였다.
또 베르사유 교구의 어느 교회에서 한 아이는 준비가 부족하였기에 첫영성체를 연기하게 되었다. 아이는 순순히 따랐다. 그런데 아이 모친은 체면이 안 서고 모처럼 지은 옷이 소용없어진다며 억지로 다른 애들 속에 끼여 성체를 영하게 했다.
그러자 아이는 경련을 일으켜 신부의 위로도 거절한 채 "지옥에 간다. 영원히 벌받는다."하고는 숨이 졌다.
이 두사람은 확실히 지옥에 갔는가? 실제는 모른다. 신을 욕한 볼테르 따위도 지옥에 떨어진 것 같지만 그렇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임종 때에 하느님과 죄인 사이에는 사람의 지혜를 초월한 많은 비밀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사랑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성자의 피로써 우리를 속량하시고 그 구령을 무엇보다도 원하신다. 특히 임종 때에는 회개에 필요한 은총을 주신다. 성교회는 어느 개인이 지옥에 떨어졌다고 단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선고를 내릴 분은 다만 하느님 뿐이시다. 피조물인 우리가 이런 단정을 내리는 것은 하느님의 권리를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을 판 유다나 주님의 왼쪽에 못 박혔던 도둑, 기타 성서에 기록된 다른 이에 대하여 함부로 지옥에 떨어졌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쯤 그레고리오 16세 때에 파로타라는 신부가 있었다. 성덕으로 이름이 높아서 죽은 뒤에는 복자위에 올리기 위해 조사가 시작되었다. 일찍이 이 신부는 사형수를 회개시키려고 단두대에 올라간 적이 있었다. 그 때 죄인은 하느님을 욕하면서 죽었기 때문에 신부는 신앙에 격한 나머지 그 목을 움켜쥐고 높이 치켜들어 보이며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보라, 지옥에 간 자의 얼굴을!"하였다. 이 일이 알려져서 복자위에 올리지 않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여하한 경우든 어떤 이가 확실히 지옥에 갔다고 단언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이유에서라고 한다.
어떤 노인이 몇 십 년 동안 신자 본분을 지키지 않았다. 어떤 이는 성교회를 욕하고 불신앙을 스스로 증명했다. 어떤 이는 방탕에 빠졌다가 급사한다. 어떤 이는 대죄를 범하면서 죽는다. 통회할 시간이 없었다. 위에 말한 사람들이 확실히 지옥에 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또 생각해서도 안 된다. 겉만 보고 속단하는 것은 성교회의 정신을 어기는 짓이다. 우리는 다만 이런 이들을 위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빌어야 한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 임종 때에 통회할 시간을 주신다 하여 회개하기를 미루면서 구령하려는 사람은 화염 속에서 얼음 덩이를 찾는 것과 같다. 십자가 옆의 도둑은 좋은 예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했다.
"두 사람 중 하나는 구원되었다. 희망을 가져라. 하나는 지옥에 간다. 두려워하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말]
"신앙을 얻는 것은 인간의 가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총으로 인함인 것처럼 신앙을 견지함도 그 가치 이외의 은총 때문인 것이다."
[타인에 대한 사랑]
연옥 영혼을 구하는 사람은 사랑의 계명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만사를 넘어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성심에 의합하고, 그 영광을 드러냄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또 영원한 행복을 고대하고 있는 가장 불쌍한 사람을 구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예수께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
"만일 지구가 큰 은덩이고, 바다가 값진 보옥으로 가득차 있으며, 공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좋은 향기를 풍기고 있다하자. 그것을 네게 주면 너는 만족하겠느냐?"
"주님, 저는 그렇게 막대한 재산을 받을 가치가 없습니다. 하오나, 만일 당신의 천한 종에게 한 가지 소원을 말씀드리게 허락해 주신다면 저는 위의 재산보다도 가치 있는 것을 청하고자 하오니, 주님, 불쌍한 이 죄인에게 당신 천국을 주옵소서."
연옥 영혼을 구하는 사람은 마치 이 귀한 은혜를 저들에게 주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는 선업 중에서도 최고의 것이다.
옛날 성 도미니코회의 열심한 두 수사, 베르트란과 브누아는 죄인의 회개와 연옥 영혼을 구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필요한가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한 사람은 말했다.
"실상 연옥 영혼이 고생하고 있음에는 틀림없지만 천국에 가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죄인은 구령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니 이를 구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구속 사업은 헛되게 된다."
또 한 사람은 말했다.
"죄인은 자유로이 하느님을 거스르고 있다. 은총에 따른다면 언제든지 회개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연옥 영혼에게는 자유가 없다. 어쩔 도리 없이 고생해야 된다. 예를 들면 여기 두 사람의 거지가 있다. 하나는 건강하지만 일하는 것이 싫어서 거지가 되었고 하나는 병자라서 할 수 없이 거지가 되었다. 연옥 영혼은 후자이다. 성 토마스도 말하고 있다.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살아 있는 이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보다 하느님 마음에 든다. 죽은 이는 자신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구하는 일은 대단히 필요하다.'라고."
앞의 수사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연옥 영혼이 괴로워하고 있는 환상을 보았다. 그리하여 자기의 기도, 고행, 선업 등을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반, 연옥 영혼을 위하여 반을 바치기로 하였다. 독자 여러분, 우리도 이 수사처럼 하자.
[구령의 확증]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이 있는 사람, 성모 성의패를 정성되이 달고 있는 사람, 매일 열심히 묵주의 기도 한 꿰미나 몇 단을 바치는 사람이 지옥에 떨어지는 일은 없다. 그러나 구령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를 더 보태야 한다. 그것은 연옥 영혼을 충실히 위로하는 일이다. 이로써 진복 팔단의 덕을 실천하는 셈이 되니까 반드시 천국에 가게 된다.
행복선언(진복팔단:眞福八端)이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하느님 나라의 요구인 율법의 참뜻을 가르치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참된 행복에 이르게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여덟 가지 말씀으로 밝혀 주신 것을 행복선언(진복팔단:眞福八端)이라 합니다.
★하나. "복되어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다만 하느님께 의지하는자, 또는 의탁하는자"라고 번역될 수 있는 것으로 이는 자기의 재능이나 건강, 재물, 인간관계 등이 마지막까지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겸손되이 모든 희망을 하느님께 두고 자기의 행복을 오로지 하느님께만 바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둘. "복되어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으리라."(마태 5,4)
가난하고, 고통받으며 우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위로는 기쁨과 희망의 원천이며 그들에게 함께 머물러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셋. "복되어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상속받으리라."(마태 5,5)
타인의 잘못이나 악행을 자신의 선과 초연함으로써 그를 포용해 주는 덕목을 지니는 사람은 하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넷. "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배부르게 되리라."(마태 5,6)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뜻릏 행하는 사람을 말하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를 갈망하는 사람은 그 일을 성취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섯. "복되어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받으리라."(마태 5,7)
하느님은 제사를 원하지 않고 자비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을 본 받아 그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섯. "복되어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되리라."(마태 5,8)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죄로 인해 하느님과 장애가 있지 않은 영의 맑음을 뜻하고 있으며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일곱.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들이라 일걸어지게 되리라."(마태 5,9)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은 개인적 또는 사회적 차원에서 이해와 화해를 증진시키려고 적극적으로 투신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로 칭호를 받게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덟. "복되어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하느님의 뜻과 일을 위하여 자신을 투신하고 생명을 바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말씀입니다.
- 김수환 추기경 잠언집에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설에 의하면, 연옥 영혼을 구하는 사람은 육신과 영신상과 온갖 선업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 7)라는 말씀은 그에게 성취될 것이다.
1913년 안티르 섬의 한 수사는 모든 성인의 날 축일 며칠 전에 중병에 걸린 병자한테 불려 갔다. 그는 62세의 이름만의 신자로, 44년 전부터 수계를 하지 않고 죄와 나쁜 평판 중에 살고 있었다. 사제는 말을 타고 한 시간 반이 걸려서 노인에게 갔다. 병자는 오랜 세월 동안 악한 표양을 보인 것을 모인 사람들에게 사과한 후 뜨거운 신앙으로 성사를 보고 경건하게 성체를 받아 모셨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강복하고 모두가 착한 신자로서 살도록 약속하게 했다. 사제는 이를 보고 못내 감동하여 본인에게 물어 보았다.
"44년 동안이나 죄 중에 지낸 당신에게 어떻게 하느님께서는 이 귀한 회개의 은혜를 주셨을까요?"
"아아, 신부님, 저는 매일 빠지지 않고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병자는 이튿날 이승을 떠났다. 우리도 연옥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매일 선업을 한다면 반드시 천국에 갈 수 잇을 것이다.
[이 신심의 특성]
죄인의 기도와 선업이 연옥 영혼을 구하는 데 무효가 아님은 위의 이야기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하다. 상존 은총을 가진 하느님 성의에 의합한 사람의 신심이어야 비로소 완전하게 된다. 더욱이 이 신심은 부단해야 한다. 축일이나 이따금씩 죽은 이를 도와 줌은 진실한 사랑이라고는 할 수 없다. 복음에서도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만일 참으로 죽은 이를 사랑한다면 그들의 생각이 우리에게 배어 있어 밤이나 낮이나 간단없이 즐거이 그들과 함께 살고 그 영혼을 위로할 기회라면 하나라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연옥 영혼에 대한 신심은 또 일반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물론 우리 부모, 형제, 친척, 은인, 벗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마음을 더 넓혀야 한다. 즉 그 사랑은 아담의 자손 전반에 뻗쳐져서 전 세계에 미치는 것이어야 한다.
차별을 두지 말고, 한 사람도 제외하지 않고, 죽은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함은 성교회가 희망하는 바이고 실행하고 있는 바이다. '위령의 날'이 제정되어 있음은 그 증거이다. 미사 중에도 "그리스도 안에 쉬는 모든 이를 행복과 광명과 평화의 나라로 인도하도록" 기원한다.
가톨릭 교회는 공식으로는 신자를 위해서만 기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적으로 전 세계의 망자와 미신자를 위해서도 기도하여야 한다. 그들 중에 선의를 가지고 또 하느님께 충실한 자로서 죽는 이도 적지 않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성 아우구스티노는 죽을 때까지 매일 미사 때에 모친 성녀 모니카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30년이 넘도록 그치지 않았다. 진실한 사람의 증표요 모범으로 삼아야 할 이 방법을 우리도 본받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