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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여행
☆ 야고보야, 야고보야!
○ 누구세요? …… 누가 나를 불렀는데. 이상하다. 난 지금 누워 자고 있는데…….
☆ 야고보야!
○ 저를 찾았습니까?
☆ 그래, 얼른 일어나서 따라오너라.
안개 자욱한 언덕이었다.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짙은 안개가 온 세상을 덮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서 있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뒷모습이 매우 근엄하게 느껴졌다. 누굴까?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틈도 없었다. 천천히 앞서 걸어가는 발걸음을 따라 나도 모르게 뒤따르고 있었다.
바짝 붙어 가까이 따라가려면 어느새 나보다 앞서 일정한 간격을 지키면서 걸어갔다. 발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발이 안 보였다. 긴 옷자락으로 발이 가리어 있을까?
○ 당신은 누구십니까?
☆ 내가 누구라고 말하면 놀랄 것이다.
○ 천사이십니까? 성인이십니까?
☆ ……
○ 제가 지금 저승에 왔습니까? 꿈입니까?
☆ 나는 다만 인도자이다.…… 야고보 너는 지금 잠시 이승을 벗어나 있다.
○ 그럼, 저…… 저는 죽었습니까?
☆ 아니다. 잠깐 동안 이승을 떠나 저승에 온 것뿐이다. 잠자코 따라오너라. 너에게 꼭 보여 줄 것이 있다.
나는 두려웠다. 내가 마치 전설을 소재로 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듯한 야릇한 생각마저 들었다. 무엇을 보여 주려는 것일까? 무시무시한 것일까? 아주 기막히게 아름다운 장면일까? 돋보기 안경도 두고 왔는데, 잘 안 보이면 어쩌나…….
발이 보일 듯 말 듯, 밝은 안개 속에 은은히 비치는 인도자는 날아가듯 유유히 앞서가고 있었다. 회뿌연 안개 속에 새하얀 구름 같은 인도자의 뒷모습은 틀림없이 천사라고 생각되었다.
문득 큰 대문이 보였다. 이렇게 큰 대문도 있을까? 하고 놀랄 만큼 큰 대문 앞에 섰다. 인도자는 나직한 말소리로 대문을 열라고 말했다.
나는 무서워서 떨고 있었다. 인도자가, 이 대문이 열리는 순간 나에게 두려움이나 호기심이 사라질 것이라는 말을 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일부러 검은 물감을 수백 번 칠했을 정도로 아주 깜깜한 곳이었다. 이 무서운 암흑 속에 무엇이 있을까, 이렇게 어두운 곳에 어떻게 들어가란 말인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데 인도자는 말을 했다.
☆ 내가 다시 문을 열고 나오라고 말할 때까지 이 곳에서 여러 아기들을 만나 보아라.
○ 아기들이라뇨? 이런 곳에 아기들이 있다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 문이 닫히면 곧 알게 될 것이다.
커다란 대문이 소리없이 닫혔다.
그 순간, 아기들의 울음 소리와 신음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소리만 들렸다. 공포감은 없었지만 조금 답답했다. 깜깜한 곳이지만 아늑한 느낌이 있었고, 여러 가지 소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기들의 울음 소리는 무척 슬프게 들렸고, 심하게 괴로워하는 소리도 들렸다. 어떤 아기들일까? 왜 아기들이 이 어둠 속에 있을까? 왜 보이지 않을까? 가지가지 생각들이 잇따라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 때, 또렷한 목소리로 나에게 인사하는 아기가 있었다. 소리만 들렸지 아기의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었다.
● 야고보 아저씨, 고맙습니다. 여기까지 찾아와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그래, 넌 이름이 뭐냐?
● 전 이름이 없어요.
○ 이름이 없다구? 이상하다. 그러면 왜 어두운 이 곳에 있니?
● 아무도 날 생각해 주지 않으니까, 그냥 여기 있어요.
○ 뭐? 그럼 엄마는 어디 갔니?
● 엄마요? 엄마가 나를 여기 내버렸어요.
○ 그럴 리가 있나? 아니야. 네 엄마는 곧 오실 거야.
● 아니에요. 우리들은 영영 버림받은 아기들이에요. 영영 잊혀진 아기들이에요.
○ 뭐라고? 그럼 여기가 고아원이니?
● 고아원보다 몇백 배로 괴로운 곳이에요. 야고보 아저씨, 놀라지 마세요. 여기 있는 아기들은 아빠 엄마가 낙태시켜 내버린 태아들이랍니다.
○ 뭐? 뭐라고?……
나는 가슴이 미어짐을 느꼈다. 산 같은 큰 바위에 짓눌리고 있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낙태로 죽은 아기들의 영혼들이 모여 있다는 여기 이 곳, 깜깜한 어둠 속에 소리만이 가득 차 있는 이곳,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 그럼, 아기야. 네가 여기 들어온 지 얼마나 되니?
● 잘 모르지만 이승의 세월로 따지면 몇십 년이 될 거예요.
○ 이 깜깜한 곳에서 어떻게 긴 세월을 살아왔니?
● 항상 빛을 그리워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 빛이라니? 이런 곳에도 빛이 들어올 때가 있단 말이냐?
● 아뇨. 엄마 아빠가 저를 생각해 주면 여기를 벗어나 빛이 가득한 언덕으로 갈 수 있어요.
○ 왜, 엄마 아빠가 너를 생각하지 않을까?
● 저는 임신된 지 얼마 안 되어 죽었는걸요. 엄마는 제가 엄마 뱃속에 있었는지 긴가민가했어요. 엄마가 약을 함부로 먹어 저는 죽었어요.
○ 그랬구나. 쯧쯧.
● 야고보 아저씨, 저를 도와 주시겠어요?
○ 그래 그래, 무엇이든 도와 줄게. 말해 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 해 줄게.
●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 어서 말해 봐! 무얼 어떻게 도와 줄까?
● 야고보 아저씨가 제 아빠가 되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그래? 그것 어려운 것 아니구나. 당장 아빠 할 거야. 네 아빠로서 그 다음은 무얼 하지?
● 제 이름을 지어 주세요. 이름이 있어야만 빛의 언덕으로 불림을 받을 수 있어요.
○ 그래 당장 이름을 짓자꾸나. 어떻게 지을까? 너를 이 곳에서 처음 만났으니까 '첫'이란 말을 먼저 붙이고 그 다음은…… 그렇군. 말소리로 만났으니까 네 이름을 '첫소리'라고 하자. 어떠니? 맘에 드니?
● 아이 좋아라! 이제 나도 이름이 있어. 내 이름은 '첫소리'야! 아빠 아빠, 고마워요.
○ 그래. 그 다음에는 아빠가 뭐 해 줄까?
● 아빠가 하느님께 기도해 주시면 돼요. 첫소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면 돼요. 저를 위해 꾸준히 기도해 주시면,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께서 저를 부르실 거여요.
○ 하느님께서 첫소리를 부르시면 어떻게 되는데?
● 첫소리를 부르시는 순간 저는 빛살이 가득한 언덕으로 가게 돼요.
○ 아! 놀라운 일이군! 기도가 그렇게 큰 힘을 가지고 있구나. 당장 기도 시작하마. 걱정하지 말아라.
● 아빠, 너무 너무 고마워요!
○ 오냐, 오늘부터 이 아빠는 첫소리를 마음 속 깊이 사랑하면서 날마다 날마다 기도해 주마. 첫소리야, 너를 볼 수는 없지만 한 번이라도 꼬옥 껴안아 보고 싶구나.
● 아빠, 조금만 참으세요. 아빠의 기도로 빛의 언덕으로 간 다음 아빠에게 마구 매달릴게요.
나는 눈물을 흘렸다.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죄없는 아기들의 갈망이 담긴 눈물이, 아울러 첫소리를 얻은 기쁨의 눈물이 함께 흘러내렸다.
깜깜한 이 곳에서 이런 행복감을 맛보다니! 인도자에게 큰절을 하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또 다른 아기가 가까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 야고보 아저씨, 만나 뵙게 되어 기뻐요.
○ 그래, 넌 이름이 뭐냐?
◆ 이름을 지어 주세요. 아빠가 되어 주시면서 이름을 불러 주세요.
○ 암, 그러고 말고, 네가 두 번째이니까. 네 이름을 '둘소리'라고 하자. 맘에 드냐?
◆ 야! 신난다. 내 이름은 둘소리야!
○ 둘소리야. 너는 언제부터 여기 있었니?
◆ 아빠와 엄마가 서로 좋아하는 동안 저는 엄마 뱃속에서 즐겁게 지냈어요.
○ 그런데?
◆ 어느 날, 아빠와 엄마가 돈 때문에 크게 싸웠어요. 그리고 헤어졌어요. 그래서 저는 아무 소용 없는 것이 되어 그만 병원에서 죽었어요.
○ 저런 저런…….
◆ 아빠는 저를 곧바로 잊었고, 엄마는 잊으려고 무던히 애썼어요. 이제는 영영 잊어 버렸나 봐요.
○ 그래 그래, 이제 이 아빠가 둘소리를 사랑하고 또 날마다 날마다 기도해 줄 거야.
◆ 아빠, 정말 고마워요. 아빠의 기도로 제가 빛의 나라로 가게 되면 저도 아빠를 위해 기도할게요.
○ 그래, 그래, 고맙구나. 너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마.
이렇게 하여, 둘소리의 얼굴도 볼 수 없었지만 첫소리와 한 것처럼 사랑스러운 아빠가 되기로 굳게 약속했다. 연민의 정이 아니라, 나 자신도 모르게 아빠의 깊은 정으로 아기들과 이야기하면서 뿌듯한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나 자신이 아기가 되어, 아기 같은 순수한 감정으로 우리는 신나게 서로 말을 주고 받았다.
■ 아저씨, 아저씨!
○ 넌 또 누구냐?
■ 야고보 아저씨께서 아빠가 되어 주신다면 그 은혜 잊지 않겠어요.
○ 그래, 네 이름은 셋소리로 하자. 내가 셋소리의 아빠가 되어 열심히 기도할게.
■ 아빠, 아빠. 고마워요!
나는 수많은 아기들을 만났다. 셋소리 다음에 넷소리, 다섯소리, 여섯소리, 일곱소리…… 모두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주었다. 그리고 아빠로서 기도하겠다는 약속을 굳게 굳게 하였다. 낙태되는 방법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다. 그 이유도 참으로 많았다. 약물에 의해, 돈 때문에, 이혼하기 위해, 체면 때문에, 공해로 인하여, 갖가지 충격으로, 복수하기 위해, 시기질투로, 몸매 때문에…….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럴 수가 있을까? 이래도 되는 것일까? 왜들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낙태아를 고의로 잊으려고 몸부림친다는 사실이며, 또한 낙태아의 영혼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을 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 자신이 굳어지는 듯했다.
갑자기 모든 소리가 멈췄다.
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도자가 조용히 나타났다.
☆ 새벽이 오고 있다. 빨리 나오너라.
○ 이 불쌍한 아기들을 그대로 두고 떠나야 합니까? 아직도 나를 만나려는 아기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승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체하지 말고 어서 나를 따르라.
또다시 짙은 안개 길을 걸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갖가지 감정들이 뒤엉켜 있었다. 참으로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인도자는 아무 말 없이 앞서 가다가 문득 섰다. 나 홀로 가라고 손짓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 엎디어 절을 하였다.
○ 너무도 귀중한 기회를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낙태아들의 영혼을 위한 기도를 강조하면서, 그 불쌍한 아기들을 돕겠습니다. 부족하고 죄많은 이 사람에게 귀한 체험을 허락해주시어 무어라 감사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인도자는 보이지 않았다.
꿈인 듯 생시인 듯, 나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나의 몸뚱이와 마음은 온통 격정의 물결로 휘감겨 있었다.
어슴푸레……
하얀 성모 마리아님 상이 보였다.
새벽이 소리없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