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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편] 여섯. 아이랜드 들장미 - 모린 오퍼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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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아일랜드 들장미 - 모린 오퍼렐
나는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성숙해 가면서 사진속의 내가 큰 키에 날씬한 몸매, 멋지게 휘어감겨 뒤로 넘어간 갈색 머리 등 남의 시선을 끈다는 것을 새삼 발견했다. 나는 열일곱 살이 되자 아이다호 대학 캠퍼스에서 가까운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다. 그러자 골치 아픈 수업시간만 제외하고 모든 것이 자유롭게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학교 수업에 흥미를 잃어가는 그만큼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데 정신이 팔렸다. 나는 춤을 추고 마약과 술을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남학생들과 관계를 맺었다.
11월 첫주 아침에 일어나니 독감이 심하게 들어 있었다. 너무나 몸이 아파 화장실에도 가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날 나는 대학 부속병원을 찾았다. 의사가 이것저것 질문한 다음 불쑥 물었다.
"남자친구와 살고 있지요?"
"친구가 있어요 하지만 그게 독감하고 무슨 관계가 있지요?"
"당신의 헛구역질은 임식 초기증상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당신은 임신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누군가 피하주사기에다 마취약을 가득 채워 몸 속으로 찔러넣은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멍해졌다. 나는 의사의 말을 털어버리고 싶은 기분으로 머리를 새차게 흔들었다. 이윽고 검사를 끝낸의사가 말했다.
"임신이예요. 아직 엄마가 되긴 이른 나이인데, 어떻게 할까요? 낙태 날짜를 잡아주겠어요."
나는 의사의 사무적인 말에 몸이 떨려왔다.
"아니에요. 생각 좀 해봐야겠어요."
"잘 생각하세요. 낙태가 제일 간단할 테니까요."
아파트로 돌아와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내게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인가? '오, 하느님.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하실까? 홀어머니는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나를 키우셨다. 그분은 나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지나치게 소심하고 겁이 많은 어머니는 죄를 지어 지옥에 가게 될 것을 늘 두려워했다. 어린 시절 동전 한 닢을 훔친 나는 그것 때문에 거짓말 까지 했다가 몹시 혼이 난 적이 있었다.
"모린, 어떤 작은 것도 훔쳐서는 안 된다. 도둑질하면 지옥에 간다는 걸 잊지 마라."
"엄마, 겨우 동전 한 개인걸요, 뭐."
"겨우 동전 한 개라니, 넌 거짓말까지 했어. 거짓말하면 하느님이 널 지옥으로 던져 넣으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어머니인데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면 기절을 하실 일이다. 나는 어머니는 물론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남자 친구도 이 사실을 알아서는 안되었다. 의사가 낙태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나는 병원으로 가서 마치 바지 한 벌을 주문하듯이 계산대에다 돈을 지불하고는 내 차례를 기다렸다.
네 시간 후에 내가 병원을 걸어나왔을 때 바깥은 몹시 추웠다. 몸만 상처를 입었을 뿐 아니라 내 안의 그 무엇인가에 크나큰 상처를 입혔다는 것이 점점 확실해졌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떨렸다. 이것으로 나의 윤리적 토대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나는 결국 2백50달러를 지불하고 살인을 자행한 셈이다.
아파트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가 새우처럼 웅크리고 누웠다. 그러나 내가 저지른 짓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자서 그 일을 처리함으로써 나는 완벽하게 비밀을 지켜낸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한 분만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느님 그분이었다. 이제 나는 영락없이 지옥에 떨어질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육체와 영혼에 파고드는 고통이 사라져주기만을 바랐다.
이튿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에도 고통은 여전히 떠나지 않고 있었다. 다음날,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월요일 아침이 되어 수업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집으로 가면서 나는 미사에는 갈 수 없거니와 가지 말아야 한다고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전야에 대부님이 나를 미사에 데려가려고 찾아왔다.
"안 돼요, 난 못 가요."
"모린, 크리스마스 미사에를 안 가다니!"
나는 너무나 착한 대부님의 놀람에 더 거역할 수가 없어 어린 시절에 다니던 작은 성당으로 갔다. 그날 밤 나는 일생에서 가장 비참한 몇 시간을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들 기쁨에 넘쳐 노래를 불렀다. 어디를 보나 거룩한 무리들이었다. 성당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천당에 갈 테지만, 나만은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나는 문으로 뛰쳐나가려는 나를 누르면서 일어서고 앉고 무릎꿇지를 되풀이했다. 죄로 가득찬 상태에서 1분 1분이 마치 1년 같았다. 언제 미사가 끝나지? 언제쯤 달아날 수 있을까? 나는 이곳을 빠져나가면 다시는 가톨릭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거라고 굳게 마음먹었다.
1월에 학교로 돌아오자 고통은 점점 심해졌고, 거기에 비례해 술과 마약을 복용하는 횟수가 잦아졌으며 수업은 더 소홀히 했다. 2학기가 끝나고 나는 다시 집으로 옮겨왔다. 어느 과목 하나 온전한 점수를 얻지 못한 상태였다. 이제는 나를 산 채로 갉아먹고 있는 이 끔찍한 비밀을 어머니에게 털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관계를 가졌을 뿐아니라 어머니의 손자를 살해까지 한 것이다.
"엄마."
"무슨 일이냐, 모린?"
엄마의 근심스러운 심약한 모습을 보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여름방학이 끝나갈 때쯤 어머니에게 말씀드려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어머니 쪽에서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머뭇거리다가 "모린, 너 혹시 남자를 알고 지내는 것 아니야?"하고 물었다.
"그래요."
이야기를 먼저 꺼낸 어머니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나는 어머니의 마음속에 일고 있는 갈등을 감지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피임을 권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혼전관계를 묵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순간 어머니의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줄 것인가를 알면서도 얼른 말을 해버렸다.
"엄마, 날 내버려두세요. 엄마한테는 죄송한 일이지만 난 이미 일을 저질렀고, 그래서 어쨌거나 지옥에 가리라는 것도 알아요. 벌써 낙태까지 한 번 했으니까요."
그때 어머니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나는 죽기 전에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는 마치 총에 맞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지금가지 남 앞에서 성 문제를 들먹이는 것조차 어려워하던 어머니는 아예 말문이 막혀버린 듯 조용히 서 있었다.
어머니의 충격을 받은 모습을 보는 동안 나의 숨어 있던 상처가 다시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아기가 태어났으면 지금쯤은 안고 다닐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정말 그런 일만 저지르지 않았던들!
나는 며침을 울면서 지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자 해결책이 떠올랐다. '그래, 결혼을 하면 해결될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극심한 통증으로 병원부터 가야 했다. 검사한 결과 골반염증이 심한데다가 줄창마셔댄 술 때문에 간이 많이 상해 있었다. 엄격하게 생긴 노의사는 이렇게 경고했다.
"난관에 상처가 심해 아기를 가질 수 있는 확률이 절반밖에 되지 않으니 그리 알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이 공포로 뻣뻣해졌다. 어쩌면 내가 낳을 수 있는 유일한 아기를 죽여 없앤 것은 아닐까? 나는 죄책감으로 미칠 것만 같아 병원을 나오는 즉시 교회에 전화를 걸었다.
"신부님과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웨스턴 신분인데,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저... 잘 모르겠어요. 방금 병원에서 나왔는데... 그러나 나는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를 인도해줄 누군가가 필요해요."
"자매님, 예수님을 길잡이로 삼으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 생명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십시오."
나는 전화를 끊고 나서 벽을 응시했다. 고작 이런 것이 내가 원하던 것이란 말이가? 이제 겨우 열여덟 살의 내 인생인데 벌써 병들고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무섭게 화를 내고 계실 테고,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튼 나는 신부의 조언 따위는 금세 잊어버렸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새롭게 아기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삶의 계획을 세우고 술과 마약을 끊고 좋은 결혼상태를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9개월 후에 아는 그레그와 결혼해 딸 로라를 낳았다. 아기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나는 아기를 품에 안음으로써 비로소 진한 모성애를 느꼈다. 3년 뒤 아들을 낳았고 이름은 케빈이었다.
그러나 결혼은 실패작이었다. 그레그와 나는 말도 하지 않았고 싸우지도 않았으며, 무엇 하나 함께 하는 일이 없었다. 우정과 대화와 즐거움을 원하던 나로서는 그와 함께 지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텔레비전을 보는 것뿐이었다. 나에게 돌파구가 필요할 즈음 빌 삼촌이 말했다. "나한테 오려무나. 몬태나에 커다란 농장이 있으니까."
나는 새로운 삶을 기대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몬테나로 떠났다. 그러나 그 농장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마리화나4백 그루였다. 나는 몸이 얼어붙었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만일 다시 이런 것에 손을 댔다가는 좋은 엄마가 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분명했다. 나는 절망에 빠져 그레그에게 전화를 걸어 "얼은 와요. 당신이 꼭 필요해요." 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너무도 끔찍스러워 말도 제대로 안나온다. 그레그는 가장 친한 친구 롤과 함께 그 다음주에 도착했지만, 나를 마약에서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마약에 맛들이고 말았다. 나는 홧김과 롤과 하룻밤 불장난을 벌였다.
그리고 스스로 자초한 삶 속에 눌러앉아 있었다. 네 살배기와 한 살배기 아이들이 있고, 남편은 마약에 목을 매달고 있고, 거기다가 나는 남편과 가장 친한 친구의 아이를 뱃속에 담고 있었다.
롤이 생각하는 해결책은 "가서 낙태해." 하는 너무도 간단한 것이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나는 비명을 지르며 거절했다.
"달리 방법이 없어. 난 아이를 부양할 생각이 없으니까."
"알아요. 다른 방법이 있겠지요."
새로 태어난 아기는 아들이었다. 브라이언은 어떤 아이보다도 더 예뻤다. 나는 분홍빛이 도는 작은 발가락을 하나씩 세어보고 또 세어보았다. 그리고 감미롭게 생긴 아기의 둥그스름한 얼굴을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그런 다음 입양 승낙서에 서명을 한 뒤 아기와 작별을 했다. 젊은 부부가 아기에게 정답고 안락한 가정을 마련해주었다.
그후에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그레그와 나는 서로를 위해 헤어졌다. 케빈에 대한 법적 보호권은 내게 있었지만 그레그가 데려갔다. 그런데 나중에 케빈을 다시 데려와 보니 어린 아들이 그동안 성추행을 당하며 살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스물여섯의 나는 부서지고 실패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나는 침대에 기어들어가 흐느껴 울었다. 내게는 희망이라고는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못된 사람이 나였다. 친구도 없고 어머니는 아미 나에게서 등을 돌린 지 오래였다. 게다가 나는 다시 마약에 손을 대고 있었다. 네 아이를 낳았는데 하나는 내가 죽였고, 하나는 남에게 주어버렸고, 하나는 추행을 당하며 살도록 방치했다. 죄책감이 나를 압도했다. 그 많은 실패를 생각하면 질식해 죽을 것만 같았다.
나는 열여덟 살부터 기도를 하지 않고 살았다. 사제가 나에게 뭐라고 했던가? 예수님에게 눈을 돌리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나에게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예수님, 제 힘으로는 되는 일이 없습니다. 당신 손에 저를 맡기오니 아무쪼록 천사를 저에게 보내 이 구렁텅이에서 건져주십시오.'
나는 기도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과연 하느님은 나 같은 인간의 기도도 들어주실까? 나는 아이들을 집 부근에 있는 작은 마을교회의 아기학교에 데려갔다. 그곳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였다. 아이들이 교실에 들어간 뒤 서성거리고 있느데 어떤 남자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존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당신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알리고 싶어하십니다. 주님이 당신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는 어리벙벙해졌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그 남자가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잘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순간 나는 눈물을 쏟았다. "아뇨, 아니에요. 잘 되어 나가는 건 하나도 없어요."
그러자 어떤 여자가 내게 대가와 나를 두 팔로 감싸안았다.
"이봐요, 이봐요, 이젠 걱정할 것 없어요. 내가 곁에 있을 테니까요." 부드럽고 다정한 그 여자는 이름이 진이라고 했다.
이 사람들은 대체 누구인가? 한 주일을 보내면서 그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에 일요일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내가 맨 처음 만난 사람은 존이었다. 그는 나를 가볍게 포옹하면서 다시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
"주님이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딸 하나를 더 보내주시겠다고요. 딸 이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금방 알아볼 수 있어요. 혹시 이름을 가르쳐줄 수 없겠습니까?"
"모린이에요."
그러자 그가 큰소리로 웃으면 얼마 전에 사들인 보트의 뱃머리에 '모린'이라는 이름을 새겨넣었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때 존의 부인이 우리 곁으로 다가와 내 이름을 전해 듣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느님께선 당신을 우리한테 보냈다는 걸 알아요. 이제부터 당신은 우리 딸이에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하염없이 울었다.
"우린 당신이 약물을 남용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이제부터는 무엇이든 도움이 필요할 때 한식구처럼 생각하고 의논하도록 해요."
정말 난데없이 가족이 생긴 셈이다. 나를 사랑하고 보살펴줄 부모와 자녀들, 나는 중얼거렸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들 부부가 나에게 놀랍도록 잘해준 반면에 나의 나약한 의지는 그들의 사랑을 악용했다. 그들이 아이들을 보살펴주는 동안 나는 술과 마약에 취하곤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나를 사랑해주었다. 나는 그 사랑에 이끌려 성서를 읽기 시작했다. 성서를 읽으면서 나는 조용하고 잔잔한 방법으로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시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변변찮은 믿음이요 매일같이 이어진 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나는 때때로 마음의 평화를 맛보곤 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는 내가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그러다 보면 나는 다시 술집으로 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또다시 곤경에, 커다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 전에 나는 집 안에 숨어든 좀도둑에게 상처를 입힌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좀도둑을 술집에서 마주친 것이다. 나는 그의 패거리 여섯 명을 상대해야 했다. 나는 상당히 취해 있었고 몹시 화도 났기 때문에 그자들을 한꺼번에 상대할 태세를 취했다. 모든 눈이 나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그때 오토바이를 타고 매섭게 생긴 남자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검은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늘이고 있는 그는 검은 가죽옷에 쇠사슬을 두르고 있었다. 그가 내 앞에 나타나자 그들은 어느새 도망쳐버렸다. 그들은 내가 무서워 도망친 것이 아니라 나를 비호하고 나선 이 남자가 두려워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제의를 받아들여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의 이름은 이안이었다. 나는 그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다.
"엄마 집에 없다고 해라." 나는 로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때 "이걸 네 엄마한테 드려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붉은 장미 한 송이였다.
장미라? 나에게 장미를 보내? 세상에서 가장 못된 나 같은 인간에게 말야? 그 다음날에도 그는 장미 한송이를 보내왔다. 이런 일은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나는 마침내 그의 뜻을 받아들여 커피 한 잔을 같이 마시기로 했다.
검은 가죽옷을 입고 이상야릇한 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겉모습과는 달리 그는 마음씨가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가 나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모린, 내가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소. 당신은 내 아내가 될 여자라고 말이요."
나는 웃어버렸다.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속해 있는 오토바이 서클 이름이 '지옥의 천사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삶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한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이안을 존 부부에게 소개했고, 그들은 가죽옷에 쇠사슬을 줄레줄레 매달린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나를 따뜻하게 환대했던 것처럼, 이안도 작은 마을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결혼했고, 드디어 나는 딸을 낳아 이름을 클라라로 지었다. 나는 아울러 신앙도 성장하기 시작했고 하느님께 기도드릴 줄도 알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술과 마약과도 작별을 고할 수 있었다.
어느덧 나는 서른셋이었고 로라는 열셋, 케빈은 아홉, 클라라는 두 살이었다. 이안과 나 그리고 아이들은 장미로 뒤덮인 시골에서 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낙태 문제를 잊을 수가 없었다. 사정이 좋지 않을 때는 낙태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왜야하면 내가 그 일로 끊임없이 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삶이 아름다워지고 있으니, 나는 이런 아름다운 삶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자책감이 들기 사작한 것이다.
'그런 일만 없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기를 다시 살려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14년 전 그날 내가 그 병원으로 걸어가지만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하느님 앞에서 울고 또 울었다. '너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죄송하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낙태 문제는 매시간 내 생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걸핏하면 현기증이 일었다. 어떤 날은 힘이 쭉 빠져 일도 하지 못했다. 머릿 속을 가득 채우는 꾸지람 소리에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온몸이 죄책감과 수치감이라는 무거운 쇠사슬에 꽁꽁 묶여 있는 느낌이었다.
작은 교회 사람들은 하느님이 무슨 죄든 다 용서하신다고 말하곤 했지만, 나는 용서받았다는 느낌을 맛볼 수가 없었다. 나는 못견디게 괴로웠다. 내가 아무리 기도드려도 하느님은 나 같은 사람은 결코 용서해주시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주에 사고가 발생했다.
나는 내 인생을 바꾸어놓기 시작한 바로 그날을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때는 아침 8시였다. 로라는 길 건너편에서 스쿨버스를 타려고 방금 현관을 나섰고 케빈 역시 문을 나서며 "다녀올게요, 엄마." 하고 인사했다. "뽀뽀하고 가야지."하고 내가 말하자 케빈은 잽싸게 돌아와 내 볼에다 입을 맞추고 달려나갔다. 바로 다음 순간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 무거운 물건이 떨어지는 듯한 둔한 울림이 뛰따랐다. 나는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길에 미처 닿기도 전에 무슨 일일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케빈의 몸뚱이가 도로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내 아가, 내 아가." 나는 아들의 머리를 두 손으로 받쳐올렸다. 아들의 몸은 축처져 있었고, 활짝 열린 두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길 한가운데는 녹색 트럭이 정차해 있었고, 트럭의 앞덮개가 10센티가량 움푹 찌그러져 있었다. 케빈의 머리, 내가 받쳐들고 있는 생기 없는 그 작은 머리가 그것에 부딪힌 것이다. 경찰이 왔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기록부에 '현장에서 즉사.'라고 적고 있었다.
나는 울면서 하느님께 부르짖었다. "안 돼요, 안 돼. 내 아이는 안 돼요. 내 아이를 돌려주세요, 다시 돌려주세요. 제발 아이가 죽지 않게 해주시고, 살더라도 식물인간이 되지 않게 해주세요. 오, 하느님. 아이를 온전한 상태로 돌려주세요. 제발, 하느님. 오, 하느님, 하느님." 그러나 나는 아들의 뇌와 간, 양쪽 폐, 신장, 심장 모두가 온전하게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제발, 하느님. 아이를 온전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만들어주세요."
경찰은 나를 떼어내려고 했다.
"오, 하느님. 내 아들을, 내 아들을 정상적인 아홉 살짜리로 되살려주세요."
"부인, 당신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제발 그만해요. 아들은 10분 전에 죽었습니다."
"하느님, 제발 아들을 돌려주십시오."
그러자 경찰이 화를 냈다.
"계속 입을 다물지 않으면 때려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하겠소."
그때 이웃에 사는 사람이 경찰에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기도하는 소리도 못 들었소?"
"저게 기도하는 거란 말이오?"
"오, 하느님. 아들을 온전히 당신 뜻에 맡기오니 데려가시려면 데려가셔도 좋습니다만, 남겨두시려면 온전히 낫게 해주십시오."
그 사람이 케빈의 심장에 손을 얹어보더니 고함을 질렀다.
"아이가 살아났어요! 아이가 살아났다고요!"
나는 그의 고함소리가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사람은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아이가 살았어요! 케빈이 살아났다고요!"
경찰은 그를 바라보다 이어 케빈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를 둘러쌌다.
커다란 소동이 벌어졌다. 장의차 대신 구급차가 달려왔다.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하느님은 케빈에게 기적을 베푸셨다, 그리고 나에게도.
나는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는 케빈 곁에 앉아 작은 손을 잡아주었다. 방금 벌어진 일을 두고 온갖 의문들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분면한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물음이었다. '모린, 넌 얼마나 달라져 있지?' 사실 나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 이미 무엇인가 변화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내 온몸을 묶고 있던 죄책감과 수치감이라는 쇠사슬이 어느 사이에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달라져 있었다. 드디어 해방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그 대답은 수정속을 들여다보듯 확연했다. 하느님이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면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도 있지 않겠는가.
밝고 찬란한 2개월이 지났다. 케빈은 건강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다. 이제 온 세상이 달라 보였다. 나는 하느님이 용사하실 경우 아기를 죽인 죄까지도 완벽하게 용서하신다는 걸 한 점의혹 없이 믿게 되었다.
케빈 역시 달라져 있었다. 그 아이는 더욱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느날 오후 우리가 자동차를 타는데 케빈이 말했다.
"하느님이 내게 말씀하셨어요. '내 천막으로 들어오라, 반드시 내 천막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말예요."
나는 처음에 케빈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 아이의 말이 너무나 이상하고 터무니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다시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엄마, 하느님께서 '내 천막으로 들어오라, 반드시 내 천막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하셨어요."
이안과 나는 동시에 케빈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이니? 하느님의 천막이 어디 있다는 거야? 그곳이 어디인지 말해주면 함께 가보기로 하자꾸나."
"슈퍼마켓 옆에 서 있는 작은 갈색 건물이 바로 하느님의 천막이라고 하셨어요."
그러자 이안이 큰소리로 외쳤다.
"그건 가톨릭 교회인데?"
그 순간 내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곳은 내가 결코 갈수 없는 곳이었다. 열여덟살 때 크리스마스 미사를 드리던 기억이 불현 듯 떠올랐다. 나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면서 이안과 케빈에게 말했다.
"난 가톨릭 교회에 나갈 수 없어. 너무나 두려워."
이안은 놀란 눈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용서받았다고 했는데, 뭐가 두렵지?"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요. 나는 하느님이 두려워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내가 두려워하는 건 가톨릭 교회라고요."
그러자 이안이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 가고 싶지 않다면 내가 케빈을 데리고 갔다 오겠소."
결국 이안은 케빈을 데리고 갔다. 나에게 있어 가톨릭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장소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친구 바바라가 와서 설득하기 시작했다.
"모린, 나와 함께 미사에 가자. 네가 꼭 만나봐야 할 신부님이 계셔."
"안 가."
"구엘모라는 신부님은 정말 놀라운 분이야."
"절대 안 가."
성당 생각만 하면 내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었다.
"널 위해 가자는 게 아니라 날 위해 가 달라는 거야."
나는 신음소리를 냈다. 바바라는 나에게 더없이 잘해주는 친구였다. 나는 마지못해 승낙을 했다.
"나 때문에 가는 게 아니라 너를 생각해 가는 거다."
나는 성당 안에서 바바라 곁에 꿇어앉아 사람들한테 아주 특별한 존재로 인정받고 있는 신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회색 머리에 나이든 신부였는데 더없이 온화해 보였다. 나는 미사의 장면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성변화 때였다. "이는 내 몸이니라." 하는 말을 듣는 순간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해묵은 기억들이 되살아나면서 의혹들이 밀려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질문을 던졌다. '주님, 저 면병이 정말 당신이란 말입니까?'
영성체 때가 되었다. 누군가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바바라가 나한테 나가자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또 한번 팔꿈치 신호가 왔고, 나는 다 옆으로 움직였다. 그 다음 팔꿈치 신호가 한 차례 더 반복되면서 나는 좌석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잠시 후에 나는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내 코앞에서 구엘모 신부가 성체를 영해주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몸."
나는 본능적으로 혀를 내밀었다. 그러자 신부는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결코 이후에도 겪어보지 못할 행동을 했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성작이 놓여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라고 했다. 나는 그리스도의 성혈을 받아 마셨다. 하느님의 손길이 뜨겁게 와닿는 것만 같아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사제가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물었다.
"늘 무엇인가 의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나는 정신이 어질어질한 채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내자리 저쪽 끝에서 바바라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가 아까부터 저자리에 있었다면 내 옆구리를 찌른 사람은 누구였단 말이가?
미사가 끝나고 커피를 마시는 시간에 아직도 어리둥절해 있는 나한테 바바라가 물었다.
"모린, 아까 네 곁에 있던 천사 보았니?"
"무슨 천사?"
"마사 때 네 곂에 붙어 있었잖아. 난 그 천사 때문에 네가 몸을 움직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몸이 얼어붙는 듯 했다. 나는 구엘모 신부에게 다다가 재빨리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난 고해성사도 받지 않은 영성체를 했어요."
선하기 이를 데 없는 신부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알아요, 그래서 성체를 배령하기 전에 당신의 죄를 사해주었지요." 그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다음 토요일 3시정각에 고해소에서 만나요."
토요일이 되어 집을 나서면서도 고백하러 갈 필요가 없다고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동차는 여전히 가고 있었다. 길모퉁이를 돌아서자 서쪽 하늘에서는 붉은 공처럼 생긴 태양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피가 저렇게 붉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둥근 모양은 성체를 그대로 닮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고 성당으로 곧장 자동차를 몰았다.
나는 모든 것을 고백했다. 물론 낙태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내가 받은 보속은 무엇이었던가? 마음이 거룩하고 따뜻한 신부는 내게 필요한 것은 어려운 보속보다 실천 가능한 보속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1년간 주일 미사에 참석하여 영성체를 하도록 하시오."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 나의 혼인은..."
"하느님은 당신을 교회 안에 맞아들이시고 싶어하십니다. 당신의 혼인도 바로잡힐 겁니다."
크리스마스였다. 그 가을에 이안과 나의 혼인은 축복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 여름에 이안과 이이들과 나의 사랑하는 양부모가 함게 세례를 받았다. 오늘날 나는 예수님한테 온전히 용서받고 원상태를 회복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연하게 알게 되어 충만한 기쁨을 누리고 있다. 로라와 케빈, 클라라, 새로 태어난 아기 캐서린, 이안, 나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선하신 손길에 감복하고 있다.
* 편집자 주 : 내가 참석한 본당 만찬에 모린과 그 가족도 함께 참석했는데, 어떤 사람이 인근에 살면서 오토바이를 왱왱거리고 시끄렇게 굴며 남의 집을 몰래 침입하는 사람들을 두고 불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린이 말했다. "그들에게 말하세요. 하느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모든 대화가 중단되었고 눈들이 모두 모린에게로 쏠렸다. 그녀는 계속 말했다. "알아요. 전에는 나도 오토바이를 탔어요. 끔찍한 일들도 저질렀고요. 하지만 하느님의 규범을 깨뜨린 나에게 하느님은 변함없이 사랑을 쏟으셨어요. 그러니 그 남자들한테 가서 말하세요.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하느님은 여전히 당신들을 사랑하실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