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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편] 넷. 교회규범의 파수꾼 - 리즈 영-아볼
오디오북 : 넷. 교회규범의 파수꾼 - 리즈 영-아볼.mp3
넷. 교회규범의 파수꾼 - 리즈 영-아볼
"신부님, 범한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고해성사를 본 지 6주일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 동안 피임을 해왔으며 ..."
1965년 나는 스물다섯 살로 두 자녀(두 살베기 데비와 네 살배기 빌리)를 키우고 있었고, 남편 돈은 해군이었다. 남편이 3주일을 집에서 함께 보내는 동안 우리는 피임기구를 사용해야 했다. 그가 다시 바다로 나가자 나는 이런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몹시 아팠다. 나는 하느님을 사랑했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나는 신자로서의 규범을 깨뜨리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고해실에서 죄를 고백하고 난 다음 나는 금방 맞닥뜨릴 난처한 처지를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임기구를 사용하는 것이 대죄라는 건 알지만 남편이 베트남에서 돌아오면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할 입장입니다. 그가 기항하는 기간은 고작해야 2, 3주일밖에 안 돼요. 그렇지만 그가 집에 돌아와 있는 때는 피임 때문에 미사만 참석하고 영성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 마음이 아픕니다. 신부님, 대체 어떻게 하면 좋아요? 어릴 때부터 저는 교회규범을 잘 지켜왔고 또 지금도 그런 마음인데 지킬 수가 없는 겁니다."
"자매여, 남편이 언제 귀가합니까?"
고해실 밀창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반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는 연민의 정을 담뿍 담고 있었다.
"1년 이상 있어야 해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1년 후에는 자매님의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자녀를 더 갖기를 원할 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런 문제는 남편과 직접 의논 해보십시오."
신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해보도록 하겠어요."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빌리와 데비와 식탁에 둘러앉아 신대위치로 식사를 대충 때우고 있는데 빌 리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빠가 보고 싶어. 아빠가 얼른 집에 왔으면 좋겠어. 아빠가 있을 때는 맛있는 것이 많이 나오는데."
그러나 데비까지 "나도 아빠가 보고 싶어." 하며 형의 편을 들고 나섰다. 아이들이 계속 투덜거리자 나는 화가 났다.
"너희 둘 다 입 좀 다물지 못하겠니? 아빠가 없는 것을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내가 큰소리를 지르자 빌리가 울기 시작하더니 우유를 쏟았다. 우유는 식탁에서 무릎으로 사정없이 흘러내렸다. "바보같이 이게 무슨 짓이니?" 나는 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데비가 따라서 울기 시작했다. 나는 빌리의 뺨을 때리고는 아이들을 침실로 쫓아버렸다. 아이들은 서럽게 훌쩍거리며 부엌을 나갔다.
우유를 닦으면서 나도 슬퍼진다. '아, 하느님. 아이들을 떼리고 산다는 것이 너무 힘이 듭니다. 저는 좋은 엄마가 못 된다는 것이 너무 분명합니다.'
이렇게 한탄하다가 신부의 충고를 다시 생각했다. 고해실에서 들을 때는 신부의 말이 아주 현명해 보였는데 현실에서는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아직 먼 일이긴 하지만 남편이 돌아오면 자신이 취할 태고가 어떤 것인지 이미 알 수 있었다.
1966년, 돈이 6주간 휴가를 받아 집으로 왔다. 나는 기쁘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어떤 다른 방법이 있기를 바라면서 나는 다른 사제를 찾아 고해성사를 보았다. 나 같은 처리라면 피임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해주기를 기대하면서, 그러나 고해실 밀창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나를 더 실망하게 했다.
"만일 은총 상태에 머물고 성체를 배령하려면 당신과 남편은 남매처럼 생활해야 합니다."
나는 사랑하는 남편과 1년이 넘도록 떨어져 살아온 젊고 건강한 여자였다. 따라서 그런 충고를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는 다시 피임을 했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미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
남편을 따라 우리 가족은 일본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생활은 남편이 바다에 나가 있는 동안에는 - 연중 대부분을 그랬지만 - 미사에 참여하나 남편과 함께일 때에는 냉담자가 되어는 생활이 습관처럼 굳어졌다.
그러나 그렇게 주의를 했는데도 진료소에서 임신여부 검사 결과 양성으로 나왔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 그날 오후에 남편의 배가 입항했다. 나는 다른 아내들과 함께 부둣가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날처럼 애타게 그를 기다린 적은 없었다. 남편과 이 일을 의논하면 마음이 가벼워질 것 같았다. 그런데 배는 우리의 눈앞에서 방파제를 코앞에 두고 선회하더니 먼바다로 돌아가 버렸다.
그 전 주일에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 있었는데 갑자기 남편의 배가 구출하러 가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돌아올지 모를 일이었다. 고국을 떠나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나는 말할 수 없이 고단하고 외로웠다. 아이들도 전혀 위안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에게 아주 쌀쌀한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또 임신을 한 것이다. 너무나 두려웠다.
길고 긴6주간이나 지난 뒤 남편이 돌아왔다. 우리가 사랑을 나누고 난 다음 나의 결심을 말했다.
"아이를 떼어야겠어요."
"여보, 리즈. 아이 하나 더 키울 여유는 있잖아?"
"당신은 이해 못해요.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해요?"
"더군다나 낙태는 불법이야."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여기 일본에서의 이야기지."
"당신 건강도 생각해야지, 휴유증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할 거야."
"돈, 들어봐요. 당신은 늘 바다에 나가 있어요. 내가 집에서 아이들과 어떻게 지내는지 알기나 해요? 당신은 내 입장을 몰라요. 나도 사랑스런 어머니가 되고 싶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요. 난 지쳤어요. 너무 피곤해요."
"그래, 난 당신을 도와줄 수가 없어. 해군이란 직업은 좋은 남편 노릇을 못하게 만드는 것이 분명해.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자구."
"나는 도저히 자신이 없어요, 돈. 난 이미 작정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자연유산이라는 요행을 바라기도 했다. 그러면 죄를 짓지 않고 이 난경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은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다. 남편 동료의 부인들과도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그들은 낙태를 조금도 죄라고 생각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낙태가 가장 현명한 해결책으로 떠올랐다. 드디어 결심을 했다.
남편이 바다로 돌아간 다음 친구 릴리안은 자신의 자동차로 수술해줄 의사에게 데려다주고 통역까지 담당해주었다. 그 무렵 나는 임신 4개월째 접어들고 있었다. 낙태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있었으므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이 돌아왔을 때 릴리안이 자신의 남편과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내가 깨어난 것을 모르는 듯했다.
"너무 끔찍했어요. 의사가 나보고 증인을 서라고 하는 바람에 곁에서 지켜보았는데, 태아는 손과 팔과 몸체가 완성된 여엇한 남자 아기였어요."
릴리안은 눈물까지 흘리면서 자신이 목격한 바를 남편에게 줄줄이 늘어놓고 있었다. 나는 좁은 공간에 누운 채 휘장 저쪽에서 들려오는 흥분된 친구의 말소리를 들으면서, 갑자기 이것이 어떤 이유로도 납득될 수 없는 엄청나고 끔찍한 현실임을 깨달았다. 다음 순간 그 사실이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러니까 나는 다름아닌 살인자였던 것이다.
우선 남편에게 뱃속의 아이를 지워버렸다는 사실을 편지로 알렸다. 그런 다음 성당으로 전화를 걸어 해밀턴 신부가 성사를 주는 금요일에 고해실을 찾았다. 신부는 친절하고 이해심이 깊었다. 그러나 고해실을 걸어나올 때 나는 전보다 더욱 심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녁마다 나는 살인자라는 사실을 의식하며 잠자리에 들었고 아침이면 같은 의식 속에서 잠을 깼다. 고뇌는 임신을 하고 있을 때보다 훨씬 깊었다. 낙태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이가 더 생기면 빌리와 데비를 더 귀찮아하지 않을까 하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상황은 정반대로 나타났다. 걸핏하면 아이들에게 화를 내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을 멀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나 자신마저도 미워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증오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방법으로 열심히 자원봉사를 하고 해군 부인회의 일도 했다. 날마다 미사에 참여했고 매월 첫째 주에는 반드시 고해성사를 받고 살인자인 나의 죄가 사해질 수 있는 은총에 관해 설명했지만, 나는 용서받지 못했음을 절감하고 있었다.
남편이 돌아왔을 때 우리 살이는 예전 같지 않았다. 남편은 나를 차갑게 대했고, 그의 냉정함은 내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 1주일이 지나고 나서 남편은 바다로 돌아갔다. 남편이 떠나자 나는 또다시 임신한 것은 아닐까 해서 신경이 곤두섰다. 누구에게나 화만 냈다. 얼마 뒤 다행스럽게도 임신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자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다시는 마음고생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편이 귀가했을 때 다시 피임을 했고 미사 참석은 중단해야 했다.
나는 변했다. 한때는 하느님의 사랑을 가까이 느끼며 살았으나 이제는 그 사랑이 멀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내 주변의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고, 어떤 아기도 가까이 보지 않으려고 했다. 아기와 한방에 있노라면 식은땀이 흘러서 도저히 함께 있을 수가 없었다. 아기의 울음소리만 들으면 나는 곧장 도망치지만 '살인자, 살인자.' 하는 소리는 계속 따라왔다.
1968년, 낙태한 지 2년이 지난 그해에 남편이 다시 바다로 돌아가고 나서 얼마 뒤에 진료소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부인, 검사 결과가 나왔느데 임신입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나는 전화기 곁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낙태일자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천천히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통화가 되기 전에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았다. 나는 낙태가 얼마나 사악한 짓인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런 짓을 다시는 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어떻게 해서든지 자연유산을 시키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는 무거운 기구를 옮기고 나서 뜨거운 물속에 들어가 앉았다가 나와 미사에 가서 아무쪼록 내가 한 처방들이 효력을 발휘하여 그렇게 원하고 원하는 유산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성당에 들어서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신부가 어떤 부부와 함께 제의실에서 나왔다. 그 아기에게 세례를 주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자 즉시 식은땀이 흐리기 시작했다. 신부가 물을 부으면 아기는 울음을 떠트릴 테고, 내 입에서도 비명이 터져나올 것이다. 그렇다고 일어나서 성당을 나가면 사람들이 모두 쳐다 볼 것이고,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자리에 앉아 두 주먹을 꼭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날 집에 돌아와 밤새도록 울었다.
하느님은 내 아이를 유산시키려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명백했다. 나는 그 이유를 내가 저지른 낙태를 하느님이 용서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분과 거래를 시작했다.
"하느님, 만일 저를 용서해주신다면 저는 매일 미사에 참석하고 남은 생애 동안 교리를 가르치며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또한 사랑스런 아내와 어머니가 되고 다시는 화를 내지 않겠습니다."
나는 내가 그토록 소망하듯이 하느님께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대신에 교회의 부속물이 된 듯이 살았다. 교리반을 맡아 가르치기 시작했고 성당일이면 무엇이나 닥치는대로 했다. 그런 식으로 나 자신을 혹사함으로써 하느님에게 용서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살인자일 뿐이었다. 그것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짐이었다.
1969년, 프랭키가 태어났다. 그러나 나는 그 아기도 안기만하면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요람에 뉘어놓을 밖에 없었다. 일곱 살이 다 된 데비와 빌리는 도와주는 여자를 고용해서 맡겼다. 나는 아기에도 정이 없었지만 데비나 빌리에 대해서도 냉정했다.
1971년, 우리 가족은 미국으로 돌아왔고 나는 불임수술을 받았다. 불임수술은 내가 더 안심하면서 살아가려는 방편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여전히 고해성사를 보러 다녔고 그때마다 낙태 사실을 고백했지만 횟수는 그 전보다 줄어들었다. 나는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키느라 날마다 미사에 참석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일에 혼신을 쏟았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보속으로는 용서받았다고 느낄 수가 없었다. 나는 여전히 식은땀에 젖은 채 잠에서 깨어나곤 했고 살인자라는 소리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에게는 좀더 힘든 보속이 필요했다. 그래서 남편에게 이야기하고 미혼모 문제에 뛰어들었다. 낙태는 이제 합법화되었지만, 다른 사람이 나 같은 괴뇌를 안고 살아가도록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74년, 또다시 진퇴양난에 빠졌다. 나는 교리를 가르치며 미혼모들의 고민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는 데 힘이 되고자 노력했다. 본당에서는 '신앙교육부장'이라는 시간제 일자리를 내게 떠맡겼다.
그때 빌리는 열세 살, 데비는 열한 살, 프랭키는 다섯 살이었다 정말 행복에 넘쳐야 할 시절이었다. 우리는 미국에 정착하여 살았고 내가 하는 일은 보람있었다. 게다가 아이들도 아무탈 없이 잘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혼자 있을 때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어느날 저녁에는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얼마나 울었던지 길이 안 보일 정도였다. 살인자는 감옥에 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나를 감옥에 보내지 않는 걸까? 나는 내 속을 편하게 해줄 보속거리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나 자신을 좀더 가혹하게 혹사해야 할지 미처 결정하기도 전에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신앙교육부'에서 마련한 죄와 윤리성을 주제로 한 강연회장에 갔을 때였다. 연사는 어떤 신부였다. 그는 강연중에 낙태를 계획적이고 고의적인 죄의 본보기로 들고 있었다. 그의 의도는 필경 그런 뜻이 아니었을 테지만 내 귀에는 낙태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도 말로 들렸다. 앉아서 듣는 동안 속이 끓올랐다.
강연이 끝나지 나는 곧바로 신부에게 다가갔다.
"나는 지금가지 당신처럼 비정하고 가혹하게 말하는 신부는 본 적이 없어요. 털끝만한 동정이나 애정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비판하고 판결하고 단죄만 하다니요."
그러면서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나의 과거의 낙태 사실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그는 한번 만나 이야기할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다. 나는 신부를 만나 침착하게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것들을 이야기했다. 그는 신중하게 듣고 있다가 "당신은 스스로를 용서하는 일만 남았어요. 하느님은 벌써 당신을 용서하셨고 지금도 당신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당신 자신에게 징벌을 가할 필요는 없어요. 스스로를 벌하기 위해 교리반을 맡고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것이 못됩니다."라고 말하더니 내게 상담치료를 받아보도록 권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남편에게 상담치료 문제를 의논했다. 물론 상담치료를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낙태에 관해 서로 입을 다물고 지내왔기 때문이다. 남편은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갈 필요 없어, 리즈. 상담치료란 정신 이상자들이나 하는 거야."
그때 나는 어째서 남편을 좀더 설득하지 않고 상담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닫아버렸는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그 뒤부터 내가 새로 시작한 일은 돈을 쓰면서 사치를 부리는 일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남편의 넉넉한 월급을 착실하게 모으는 얌전한 주부였으나, 갑자기 마구 물건을 사들이고 가구를 바꾸곤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마음은 바꾸어지지 않았다. 그저 죄책감만 깊어질 따름이었다.
1976년, 교회는 보속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좋았다.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가하는 징벌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도 가능해진 셈이었다. 나는 돈낭비를 중단했다. 머리손질마저 하지 않고 지내는 나를 사람들은 이상하게 보기 시작했다. 나의 교제 범위도 한정되기 시작했다.
1977년, 본당 단체인 '인간 생명'에서 성스러운 생명을 주제로 강연회를 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자리에 참석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점심식사가 끝나고 평소에 친밀하게 지내던 강사에게 다가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당신이 강연할 때 참석하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실은 11년 전에 낙태를 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당신 이야기를 들을 용기가 없었어요."
나와 눈길을 마주친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잡아주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나는 그녀의 다정한 태도에서 내심 놀랐다. 나는 그녀가 나의 비밀을 알면 함께 일하는 것도 싫어하리라 겁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녀는 나를 집으로 초대까지 해주었다. 그들은 나의 낙태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아니 그런 일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대해주어 큰 위로가 되었다. 내게는 그런 다정함이 필요한 때였다. 왜냐하면 낙태한 이후로 우리의 결혼생활은 계속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었고 남편의 냉담함은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8년,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도 여전히 나를 용서하지 않았다.
1979년, 본당에서 여러 교육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나는 개인의 소외를 주제로 다루는 그룹에 참여했다. 함께 - 10명 가운데 여성은 둘뿐이었다 - 탁자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에 화제가 낙태문제로 옮겨갔다. 동료들이 이 문제를 토론하기 시작하자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너무나 부끄러운 나머지 벌떡 일어나 방을 뛰쳐나왔다. 그때는 낙태를 한 지 13년이 지난 뒤였는데도 낙태라는 말만 나오면 나는 영락없이 상처가 도지면서 피를 흘리는 것이었다.
1980년, 사랑하는 하느님, 나의 상처는 언제 치유될 수 있을까요? 언젠가 할머니가 된 친구가 나의 상처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좀 떨쳐버리라는 생각에서 손녀를 나에게 안겨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기를 받아 안은 나는 금세 몸을 떨기 시작했다.
1981∼1986년, 10대들의 알코올 중독과 마약복용 문제와 부딪치면서 보낸 끔찍스런 세월이었다. 바로 내 아들이 그렇게 된 것이다. 나는 내 상처에 대해서는 생각할 여유도 없이 지냈으나 아이들과는 늘 멀리하고 있었다.
1987년, 알코올 중독 회복과정을 통해 다시 정상이 된 빌리가 결혼했고 며느리는 곧 임신했다. 데비도 결혼하고 아기를 낳았으므로 갑자기 내게는 두 갓난아기가 생겨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간청했다.
'제발 아기들을 안더라도 몸을 떨고 울음을 터뜨리거나 방을 뛰쳐나가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무슨 일이든지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 일만 무사히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나는 며느리가 누워 있는 분만실에 들어가면서도 너무 두려웠다. 빌리가 태어난 지 불과 몇 분도 되지 않은, 말 그대로 갓난아기를 안겨주었을 때 나는 정신이 아뜩했다. 그런데 나는 더 이상 몸을 떨지도 식은땀을 흘리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하느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다. 하느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겨우 할머니다운 할머니가 될 수 있었다.
1990년, 손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비로소 길이 열린 느낌이었다. 나는 내가 범한 죄를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할 시점에 와있음을 알았다. 조지프 신부가 낙태한 적이 있는 리아나와 연결시켜주었다. 그후 우리는 낙태 경험이 있는 여성들을 돕는 모임인 '열린 품안'에 함께 참석했다.
'열린 품안'은 내가 저질렀던 일을 거짓 없이 대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렇다. 나는 자식의 생명을 앗아버린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희망을 갖고 일어설 수 있었다. 나와 같은 죄를 범했으나 예수의 사랑에 찬 치유의 손길을 체험해온 이들이 '줄곧 내 곁에' 있으면서 치유의 힘을 가진 주님의 사랑과 자비의 샘으로 나를 이끌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꿋꿋하게 마주서는 용기와 더없는 정직성이 필요했다. 나는 우선 내 속에 잠재되어 있는 분노를 인정해야 했다. 그것은 좀더 강한 인간이 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분노였고, 낯선 땅에 홀로 내버려둔 채 데비와 빌리를 키우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던 남편에 대한 분노였고, 규범을 지키려 해도 지킬 수 없었던 여성들의 어려운 상황을 이해할 줄 모르는 교회에 대한 분노였다.
매주 우리는 성서를 공부하면서 우리의 삶을 보다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데 성서의 말씀이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가를 배워 나갔다.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다른 여성들과 함께 나누면서 매주 할당된 과제를 충실하게 해냈다. 해야 되는 과제는 과거의 사건을 글로 기록하고 남편이나 자신, 친구, 교회등과 관련해서 내 문제에 해답을 찾아내는 직업이었다. 드디어 나는 자신과 대면할 준비가 되었다. 그날은 전몰자추모일이었다. 두 번째 남편은 골프 여행을 떠났고 프랭키도 친구들과 주말여행을 떠나고 없었다. 나는 조용히 글을 쓰기 위해 먼저 음식을 다 준비해 놓고는 공책 한 권과 볼펜 한 자루를 챙겼다. 그런 다음 침실로 가서 가장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자 볼펜은 거침없이 움직였고, 그와 아울러 눈물도 하염없이 쏟아졌다. 이렇게 글을 써내려가며 울기를 여러 시간 계속했다. 이때 흘린 눈물은 내가 지금까지 흘렸던 눈물과는 사뭇 달랐다. 이 눈물은 한 인간이 다른 누군가를 불쌍히 여겨 흘리는 눈물이었다. 글을 써내려가는 동안 나는 사랑해주시고 치유해주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내내 감지할 수 있었다.
하느님은 내가 빌리와 데비에게 쌀쌀하게 굴었던 사실도 알게 해주셨다. 내가 다정한 엄마는 못 되는 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매정한 엄마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처음으로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다.
일단 글을 끝내고 나자 말할 수 없이 피곤했지만 기운이 쇠진함과 동시에 크나큰 평화가 밀려들었다. 무거운 짐을 어깨에서 벗어놓은 듯한 말할 수 없이 가벼운 기분이었다. 이제는 마음속에 그 많은 두려움을 품고 살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모든 것을 노트에 솔직하게 기록하면서 나의 지나온 걸음의 흔적을 잘 볼 수 있었다. 이제는 하느님이 나를 위해 예비하신 일이 무엇이든간에 초연히 대처할 수 있는 용기가 내 안에 생겨났다.
물론 이로써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기분이 아주 상쾌해지기는 했지만 내가 더 온전히 치유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어떤 일이 일어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마침내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였고 나 또한 자신을 용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 낙태사건을 마감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낙태한 아기에게 가버린 남편이 좋아하던 저스틴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친구 리아나는 자애로우신 성모께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달라고 간청해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나느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몇 년간 마리아께 매달리며 기도했지만 별 도움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나의 불신이 숨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나의 어머니는 유난히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깊었지만 나는 그것이 미숙한 것으로만 보였다. 우리의 기도가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하느님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원죄 없이 잉태되고 한번도 죄를 범하지 않고 평생토록 하느님의 뜻만을 준행한 성모님이, 어머니요 아내인 여성들이 오늘날 부딪치고 있는 난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원망스러움도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또 내 안에서 더 굳은 믿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부추김이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지금까지 '신앙교육' 지도자로서 기도를 가르치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선 무릎부터 꿇어야 하는 것일까? 성당의 감실 앞으로 가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일까? 로사리오기도부터 시작하면서 성모께 사죄부터 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른다.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당신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아 죄송합니다만,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런저런 궁리를 하면서 며칠을 보내던 어느 날, 나에게 조용한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고 마리아가 계신 집을 찾아갔다. 그분이 계신 방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그분에게 내게 방문을 열어주셨고, 나는 그분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다.
그러자 그분은 나를 당신의 방안으로 맞아들이셨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방은 평범하면서 현대적인 80년대 가정집이었다. 식탁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면서 나는 그분에게 전남편 돈을 찾아봐 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러자 그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그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또 부탁을 드렸다.
"그이를 보거든 저스틴을 찾아보라고 해주시겠어요? 그이가 저스틴을 찾아낼 수 없다면 대신 찾아봐 주시고요. 그리고 그이에게 저스틴에게 현생에서의 삶을 빼앗아버린 데 대해 내가 더 없이 미안해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해주세요. 저스틴을 예수님께 데려가 예수님의 축복과 엄마에게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입어야 했던 상처를 꼭 치유해주시도록 부탁드려 달라고 전해주세요, 네?"
마리아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셨다. 나는 그분을 포옹하고 깊이 감사드리며 그곳을 나왔다.
이런 기도를 바치고 나서 나는 아주 깊은 평화를 맛보았다. 이런 기도가 내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설명할 수 없지만 나는 성모님을 만났다는 것을 깊이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돈과 저스틴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꿈을 꾸었다.
'열린 품안' 연수회가 끝날 무렵에 나는 작은 인형을 하나 샀다. 저스틴을 대신하는 인형이었다. 나는 이 인형을 재봉실한 구석에 있는 유리선반 위에 올려놓고 몇 송이의 꽃과 다음과 같은 글귀로 장식해두고 있다.
'용서란 제비꽃을 짓밟은 그 발에다 흩뿌리는 향기이다.'
재봉실 한 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을 보는 사람은 꽃이 어떻다느니 인형이 귀엽다느니 하고 말한다. 그러나 이곳은 나의 큰 위안처이다. 슬플 때나 죄책감이 들 때 찾아오는 곳이면서 나로 인해 삶의 기회를 잃어버린 아기를 생각하며, 그 아기가 내게 보내준 최대의 선물인 용서를 되새겨 보는 곳이다. 그리고 언제든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고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청원기도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