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옥의 탄피 1권 : 3장 : 찢어진 종이비행기와 이승의 메아리
3장: 찢어진 종이비행기와 이승의 메아리
[어느 날 천사가 너에게 와서, 네게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고 묻는다면 어떻게 말할래...]
[커다란 종이비행기를 접어 그녀와 함께 타고...]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지지직거리는 선율. 명동 성당 지하 대기실 구석, 누군가 이승에서부터 짊어지고 온 낡은 기억의 파편이 축음기처럼 형상화되어 환청 같은 주파수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챙그랑-.
그 익숙하고도 시린 멜로디에, 내 손에서 기름칠을 하던 묵주 기관총의 노리쇠 뭉치가 허무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노래..."
잊을 수 없는 곡이었다. 이승에서 가장 눈부셨던 어느 봄날, 아내에게 어설프게 무릎을 꿇고 장미꽃과 함께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던 프러포즈 노래. 내가 가장 사랑했고, 나를 가장 빛나게 해주었던 그 순간의 테마곡.
지옥 불과 진물, 천사와 악마의 끔찍한 정치질 속에서 짐승처럼 방아쇠만 당기며 메말라가던 내 영혼 한가운데로, 잊고 있던 '인간적인 물음'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내가 죽고 난 뒤, 남겨진 나의 세계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아내는 건강한지... 아빠가 컴퓨터 조립해 주면 세상 다 가진 것처럼 좋아하던 우리 아이들은 대체 어떻게 되었는지... 내가 떠난 빈자리를 안고 얼마나 많은 밤을 울며 보냈을까.
"보고 싶다..."
함몰되었다가 이제 막 복구된 두 뺨 위로, 4차원 영혼의 파동이 뭉쳐 만든 투명한 액체가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눈물이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기분좋은상상'이라는 노래 가사 한 줄에 하염없이 터져 나왔다.
"야, 신참. 총기 수입 안 하고 뭐 하냐? 넋 나갔어?"
옆 평상에서 수류탄 핀을 점검하던 최 선배가 내 쪽을 힐끗 보더니 툭 내뱉었다. 하지만 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발견한 그의 손놀림도 멈칫했다.
"선배... 선배는 가족들 안 보고 싶습니까?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개고생을 해야 하는지, 갑자기 다 부질없게 느껴져서요. 천사나 악마나 다 우릴 장작 취급하는데, 차라리 이대로 소멸해 버리는 게..."
"헛소리 마라."
최 선배가 평소의 불호령 대신, 유독 낮고 갈라진 목소리로 내 말을 끊었다. 그는 묵묵히 기적의 메달을 융단으로 닦아내며 허공을 응시했다.
"우리가 여기서 버티는 이유가 뭐겠냐. 천국 가서 하프 뜯으려고? 아니면 저 위쪽 영감탱이들한테 잘 보이려고? 아니야."
선배는 자신의 가슴팍, 악마의 가시에 꿰뚫렸던 자리를 툭툭 치며 씁쓸하게 웃었다.
"우리가 여기서 이 좆같은 정화의 빚을 다 갚고 천국행 티켓을 끊어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나중에... 아주아주 나중에 우리 마누라나 새끼들이 수명 다해서 이 세계로 넘어왔을 때, 마중 나가기 위해서다."
그의 말에 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 녀석들이 나처럼 이 끔찍한 진흙탕 연옥에 떨어져서 악마 새끼들한테 쫓길 때, 내가 가장 먼저 달려가서 기관총 갈겨주고 구해주려면. 내가 이 바닥에서 제일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빚 다 갚고 힘을 길러놔야 할 거 아니냐. 그게 내가 이승에서 지은 죗값에 대한 마지막 책임이야."
최 선배의 무뚝뚝한 위로에, 내 가슴속에서 희미하게 꺼져가던 무언가가 다시금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천사들이 우리를 모루로 쓰든, 악마들이 전술핵으로 쓰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지켜야 할 기억이 있고, 언젠가 다시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다. 내 가족들이 훗날 이 거대한 시스템의 바다에 닿았을 때, 그들을 외롭게 두지 않으려면 나는 반드시 빛의 끝자락에라도 닿아 있어야 했다.
나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고 바닥에 떨어진 노리쇠 뭉치를 집어 들었다.
"...선배 말씀이 맞네요. 제가 잠시 약한 소리를 했습니다." "알면 빨리 탄창이나 마저 채워. 신부님도 잃은 팔 복구하시려면 시간 좀 걸릴 텐데, 그동안 우리 교구는 우리가 지켜야지."
라디오에서는 지독하게도 그 '기분 좋은 상상'이 멈추지 않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4차원의 존재가 형상화해 켜둔 라디오라 물리적인 전원 버튼조차 없었다. 끌래야 끌 수도 없는 노릇.
아내를 향한 애틋함과,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처절한 현실 사이의 괴리감에 나는 벤치에 주저앉아 점점 더 깊은 우울함 속으로 빠져들었다.
"성! 령!"
대기실 밖 복도를 지나가는 9품 하급 천사 무리를 향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습관처럼 각 잡힌 경례를 붙였다.
"수고가 많습니다, 형제여."
천사들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지나갔지만, 내 마음속은 불신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위선자 새끼들. 지각해 놓고 보고서 주작이나 치는 놈들한테 내가 꼬박꼬박 경례를 박아야 하다니...)'
이대로 있다간 속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나는 우울하고 답답한 기분을 조금이라도 달래보려, 무기고를 빠져나와 성당 본당 쪽에 마련된 성모상 앞으로 향했다. 조용히 성체조배(Eucharistic Adoration)라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힐 생각이었다.
성모상 앞쪽 제단 근처, 천사들의 인솔을 받으며 옹기종기 모여 이동 중인 한 무리의 자그마한 영혼들이 눈에 띄었다.
"어라... 아기들?"
서너 살이나 되었을까. 이 험악하고 무자비한 연옥의 최전선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순결하고 맑은 파동을 뿜어내는 아기 영혼들이었다. 나는 우울한 기분 속에서도 그 평화로운 광경에 시선을 빼앗긴 채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나와 아기들 무리의 간격은 족히 50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런데, 복도 기둥을 지나며 잠깐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제단 쪽을 바라본 그 몇 초 사이였다.

에헤헤!" "아저씨!" "우와아아!"
"어, 엇?! 야, 너희들 언제 여기까지 왔어?!"
나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어버렸다. 방금 전까지 50미터 밖 제단에 있던 5명 정도의 아기 영혼들이, 어느새 공간을 축지법이라도 쓰듯 건너뛰어 내 바짓가랑이와 허리춤, 심지어 내 양어깨 위에 이리저리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4차원 영혼들의 위상 도약이라는 걸 감안해도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 어어... 떨어져, 얘들아. 아저씨 무기 만지다 와서 진흙이랑 화약 묻어서 더러워..."
내가 당황해서 허둥대며 아기들을 떼어내려던 그 순간이었다. 내 가슴팍에 폭 안겨 있던 가장 작은 아기 영혼 하나가, 내 턱에 자기의 부드러운 볼을 훅 비비적거리며 해맑게 속삭였다.
"아저씨, 저 몰라요?"
"어...? 내가 널 어떻게..."
아기의 눈망울은 내가 지금껏 연옥에서 보았던 그 어떤 천사의 오로라보다 맑고 투명했다. 아기가 내 목을 작은 두 팔로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저씨가 이승에서 기도로 저 구해주셨잖아요! 캄캄하고 무서운 짐승들이 절 찢어 먹으려 할 때, 아저씨 기도가 반짝반짝 빛나는 방패가 돼서 절 지켜줬어요. 정말, 정말 감사해요!"
"안 돼, 얘들아! 진형에서 이탈하면 안 됩니다!"
내가 멍하니 감동에 젖어있을 찰나, 저 멀리서 다급한 날갯짓 소리와 함께 대여섯 명의 9품 하급 천사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들은 내 몸에 주렁주렁 매달린 아기 영혼들을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떼어내기 시작했다.
"자자, 이쪽으로. 구원자 분을 귀찮게 하면 안 되지요."
아기들은 천사들의 품에 안겨 멀어지면서도 나를 향해 고사리 같은 손을 뻗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길게 뻗어 아기들의 작은 손가락과 맞대어 '손가락 인사'를 나누었다.
"으윽!"
그런데 웬걸. 아기들이 내 손가락을 쥐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악력에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작고 여린 영혼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승에서 바친 '기도의 방패' 덕분인지 아기들의 4차원 영체 밀도는 무서울 정도로 단단하고 강력했다.
꽉 쥐고 놓지 않는 아기들의 손아귀 힘에 내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얏, 야, 얘들아... 아, 아저씨 손가락 부러지겠다!"
결국 천사들이 진땀을 빼며 아기들을 떼어내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욱신거리는 손가락을 털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얼떨결에 일어난 해프닝. 하지만 그 짧은 온기와 순수한 영혼들의 웃음 덕분에, 라디오 소리 때문에 끝없이 추락하던 나의 우울한 기분은 눈 녹듯 사라지고 묘한 온기가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그래. 내가 헛살진 않았구나. 내 기도 덕분에 저 작은 녀석들이 무사히 여기까지 온 거잖아.'
스스로가 꽤 대견하게 느껴져 어깨를 으쓱하던 그때였다.
아기들을 인솔하던 천사들 무리 뒤편에서, 9품 천사들과는 격이 다르게 번쩍이는 후광을 두른 자가 무거운 구두 발소리를 내며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가슴팍에는 행정망 시스템의 권한을 상징하는 자그마한 명패가 빛나고 있었다.
'7품 천사(권품천사, Principalities)'. 하급 천사들의 관리자이자 실무 책임자 급이었다.
그런데 그 7급 천사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훈훈한 광경을 지켜보는 인자한 천사의 표정이 아니라, 불심검문을 앞둔 경찰처럼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노골적으로 '의심스러운' 눈빛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군기가 바짝 들어 소리쳤다.
"성! 령!"
손가락이 부러질 뻔한 통증을 참고 이마에 칼각으로 손을 붙였지만, 7급 천사는 내 경례를 받는 둥 마는 둥 대충 손을 휘저으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자네... 아까 그 아기 영혼들이 어떻게 자네를 그토록 따르는 거지?"
"예? 아, 그게... 제가 이승에서 그 아이들을 위해 기도를 좀..."
"기도?"
7급 천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내 허름한 방탄복과 너덜너덜한 묵주 탄띠에 머물렀다.
"그런 것 치고는 자네의 영혼 질량이나 '계급(정화 단계)'이 너무 낮지 않나? 연옥 청소부 신분에 그만한 대도(待禱)의 공덕을 쌓았을 리가 없을 텐데. 기도의 수치가 시스템의 계산값과 일치하지 않아."
천사는 허공에 반투명한 푸른색 서류철 홀로그램을 띄우더니 깐깐한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영혼 데이터에 버그가 있거나, 밀수된 성물(聖物)을 쓴 것 같군. 일단 나와 '인사과'로 같이 좀 가야겠어. 조사가 필요하다."
"인... 인사과요?!"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이 지옥 같은 연옥 바닥에 대전쟁터랑 무기고만 있는 게 아니라 '인사과'라는 지독한 관료제 부서까지 존재한단 말인가!
"저, 저기요, 천사님! 전 진짜 아무 짓도 안 했는데요?! 그냥 아기들이 와서 안긴 것뿐인데 인사과 조사를 왜..."
나는 극도로 당황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또 무언가 트집이 잡혀서 이 지긋지긋한 5천 년, 아니 만 년짜리 형기로 늘어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가 엄습했다.
"잔말 말고 따라와. 항명하면 정화 기간을 즉시 500년 연장하겠다."
천사의 차가운 선고에, 나는 반쯤 울상이 된 채 터덜터덜 그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7급 천사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성당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눈을 의심할 정도로 육중하고 거대한 강철 엘리베이터 문 앞이었다.
"성! 령!"
그 앞을 지키고 있던 9품 하급 천사 경비병 두 명이 7급 천사를 보자마자 바짝 군기가 들어 우렁차게 경례를 붙였다.
나를 이끄는 인솔자가 저들보다 훨씬 상급자였기에, 나는 굳이 경비병들에게 마주 경례하지 않았다. 군대에 다녀온 짬바이브가 연옥에서도 무의식적으로 발동한 것이다.
위이이잉- 철컥.
무거운 쇳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나와 7급 천사가 탑승하자 문이 닫혔다.
우웅- 거대한 엘리베이터가 육중한 진동을 내며 지하를 향해 수직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참을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덜커덩! 하고 거칠게 멈춰 섰다. 고장인가 싶어 흠칫 놀라는 순간, 이번에는 밑이 아니라 옆으로 맹렬하게 미끄러져 가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덜커덩! 이번엔 대각선 밑으로, 그리고 다시 정면으로. 놀이기구를 방불케 하는 기하학적이고 복잡한 다차원적 이동의 연속이었다.
"뭐, 뭐야... 이거 왜 이래..."
속이 울렁거려 벽을 짚고 헛구역질을 참아내던 찰나, 마침내 승강기의 진동이 멎고 전면부의 두꺼운 철판이 스르륵 위로 말려 올라갔다.
투명한 특수 강화창이 나타났고, 그 너머로 쏟아져 들어오는 찬란하고 압도적인 빛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리고 눈이 빛에 적응하자마자, 내 입에서는 숨통이 턱 막히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헉..."
창 너머로 펼쳐진 것은 지하 시설 따위가 아니었다. 지평선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하늘과 땅의 경계마저 모호한 무한의 우주 공간 속에 떠 있는 거대한 요새 기지였다.
수백만 평은 족히 넘어 보이는 끝없는 홀 중앙에는, 빔프로젝터 수만 대를 켜놓은 듯한 거대한 입체 홀로그램 지구(Earth) 지도가 둥둥 떠 있었다. 수백, 수천 명의 천사들이 그 지도 주변을 홀로그램 태블릿을 들고 바쁘게 날아다니며, 지도 위에 표시된 붉은색과 푸른색의 '사단'과 '군단' 마크들을 이리저리 옮기며 전황을 통제하고 있었다.
"도대체... 여긴 어딘가요? 천사님?"
압도적인 스케일에 완전히 넋을 빼앗긴 나는 나도 모르게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7급 천사는 창밖의 장엄한 풍경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지독하게 건조하고 사무적인 표정으로 대답했다.
"여긴 '바티칸 총사령부(Vatican General Headquarters)'다."
"예?! 바티칸이요?"
나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 우리는 방금 전까지 명동 성당 지하에 있었는데, 어떻게 엘리베이터 몇 분 탔다고 로마 바티칸까지... 웜홀이라도 탄 겁니까?!"
내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이어가려 하자, 7급 천사가 들고 있던 서류철 홀로그램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5천 년도 더 산 내가, 한낱 4차원 청소부인 자네에게 이 엘레베이터의 '공간 도약에 관한 다차원적 양자 역학의 과학적 원리'를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하나?"
"...!"
서늘한 그 한마디에 내 등줄기로 식은땀이 쫙 흘러내렸다.
"아... 아... 아닙니다."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얌전히 그의 뒤를 따랐다.
7급 천사는 끝이 보이지 않는 워룸을 가로질러 거대한 체육관만 한 크기의 한 행정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제3교구 제2인사행정처]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거대한 건물 안에는 물리적인 종이 서류와 데이터 큐브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쌓여 있었다. 수백 명의 9급 천사들과 그 협조자들이 타자기를 두드리며 서류를 분류하고 있었다.
7급 천사가 한 행정 데스크로 다가가 차가운 어조로 지시했다.
"이 청소부 영혼(미카엘)에 대한 누락된 이승 데이터가 있는지, 전체 로그(Log)를 스캔해서 다시 올려."
차라락-! 내 이승에서의 삶과 업적을 수치화한 푸른색 데이터 창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모니터를 쳐다보던 9급 천사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뚝 멎었다. 항상 냉랭하던 7급 천사의 표정 역시 일그러졌다. 그들은 허공에 뜬 홀로그램 데이터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갸우뚱거렸다.
"이봐, 미카엘."
7급 천사가 당황스러움이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우리는 자네의 현재 처분과 이 데이터의 상태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네. 대죄 하나 없이 평생을 이타적으로 살았고, 매일 위령 기도를 20단씩 바쳐 천문학적인 은총을 쌓은 영혼이... 대체 왜 천국의 직행 프리패스를 타지 않고, 이 끔찍한 연옥의 최하급 말단 청소부로 구르고 있는 건가? 시스템 상으론 명백한 에러야. 자네 스스로 이 답을 찾아 해명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깐깐한 공무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나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외람됩니다만... 천사님. 저는 살면서, '천국은 없다'고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뭐, 뭣이라?"
"주님, 저는 지상의 모든 영혼이 구원될 때까지... 천국이 텅텅 비어 있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훌륭한 성인(聖人)도, 그 어떤 거룩한 천국의 영혼도... 이 밑바닥 지옥과 연옥에서 고통받고 찢겨나가는 형제자매들을 본다면 마음이 아파 견디지 못할 겁니다. 감히 자기 혼자 천국의 복락을 누리기를 미루고, 스스로 날개를 꺾어 다시 이 지상의 진흙탕으로 내려와 형제들을 도울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제가 배운 신앙입니다."
나는 내 어깨에 매달린 무거운 기관단총의 멜빵을 고쳐 쥐었다.
"그러니 저는 누락된 것도, 에러가 난 것도 아닙니다. 저는 제 발로 이 밑바닥 청소부 자리를 선택한 겁니다. 텅 빈 천국에 저 혼자 앉아 하프나 뜯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정적이 흘렀다. 타자기 소리조차 멎어버린 거대한 인사과 체육관 안에는, 오직 내 숨소리만이 아득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7급 천사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냉철하고 빈틈없던 공무원의 얼굴 근육이 일그러지더니, 그의 입에서 기묘한 파열음이 새어 나왔다.
"하... 하하..."
바람 빠진 소리로 시작된 웃음은 이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7급 천사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아니,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진짜 공기를 들이마신 사람처럼 허리를 젖히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기괴하면서도 벅찬 웃음소리에 전염된 듯, 나를 주목하던 수백 명의 9급 천사들과 행정 협조자들(곧 천국 입성을 앞둔 연옥 영혼들)도 일제히 넋을 잃고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7급 천사의 그 호탕한 웃음소리 끝에는 형언할 수 없는 깊은 흐느낌이 묻어 있었다.
"흐흐흐흐으흑.... 으하하흐흐흐....."
그의 번쩍이는 두 눈에서, 수천 년 동안 말라붙어 있던 뜨거운 눈물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내렸다. 그는 체면 따위는 집어던진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오열 반 웃음 반의 소리를 토해냈다.
"그래!!!! 바로 이것이다!!!!!"
7급 천사가 벼락같은 사자후를 내지르며 책상을 짚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인사과에 모인 수백 명의 천사들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제군들!!! 나는 지금, 서류와 시스템 속에 파묻혀 수천 년간 까맣게 잊고 지냈던 그 찬란한 이유를 다시 찾았다!!!!! 나약한 인간의 존재 이유!!!!!! 우리가 이 끔찍한 연옥의 최전선에서, 영겁의 세월을 묵묵히 기다리고 피 흘려야 하는 그 진짜 이유를 말이다!!!!!"
7급 천사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떨리는 손으로 진흙투성이인 내 어깨를 가리켰다.
"그것이 바로... 저 사내, 미카엘의 대답에 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거대한 인사과가 떠나갈 듯한 함성과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천사들은 서류를 허공으로 집어 던지며 환호했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반면, 나는 이 갑작스러운 광란의 도가니 한가운데서 완전히 얼빠진 채 서 있었다.
'이게 뭔 일이래... ㄷㄷㄷ'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었다. 내가 방금 내뱉은 저 거창한 문장의 깊이를 온전히 다 깨닫고 평생을 성인군자처럼 살았던 게 아니었다. 그저 이승에서 성당 다닐 때 주일학교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그럴싸한 교리나 신앙의 논리를, 분위기에 휩쓸려 달달 암기한 대로 읊은 것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천사님들이 어째서 동네 뒷산에서 천 년 묵은 산삼이라도 파낸 심마니들마냥 단체로 저 난리를 부리는지, 내 얄팍한 인간의 머리로는 도대체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씨, 괜히 오버했나...'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쳐서 행정실의 한쪽 벽면에 딱 붙어 섰다.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숨어서, 이 부담스러운 감동의 파티가 빨리 진정되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흩날리던 서류들이 바닥에 가라앉고, 천사들의 벅찬 숨소리도 어느 정도 가라앉을 즈음이었다.
7급 천사가 붉게 상기된 눈가로 휙 고개를 돌려 나를 찾았다. 그리고 벽에 빈대처럼 붙어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다가오며 소리쳤다.
"제군!!! 자네 방금 한 그 문장 그대로, '대천사(Archangel) 각하' 앞에서도 이야기할 수 있는 건가!!!!"
"네?????!!!!!!!!!!!"
내 놀란 두 눈이 주먹보다 커져서 튀어나올 뻔했다.
'아... 내 주둥이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 아이고... ㅠㅠ'

내가 덜덜 떨며 후회할 틈도 주지 않고, 감격에 차올랐던 7급 천사의 태도가 일순간 전투 모드로 돌변했다.
위잉- 철컥!
그는 갑자기 눈부신 깃털의 갑옷을 형상화하며 중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허공에서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내 몸에 걸쳐져 있던 너덜너덜한 방탄복이 빛나는 특수 슈트로 강제 환복되었고, 내 손에는 기존의 기관단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무식하고 거대한 중화기가 쥐어졌다.
"이, 이게 뭡니까?!"
"20미리 묵주 기관포다!"
7급 천사가 장전 손잡이를 거칠게 당기며 소리쳤다.
"20발의 묵주기도가 단 한 발의 철갑고폭탄으로 압축되어 발사되는 무기다! 7급 악마 따위는 종잇장처럼 관통하고, 방금 전 네가 성북동에서 상대했던 5급(간부) 짐승의 외피에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신상 장비지!"
"아니, 무기 좋은 건 알겠는데... 이걸 지금 왜..."
"제군!!!"
내 입을 막아버리듯 7급 천사가 내 멱살을 움켜쥐더니, 자신의 등에 달린 거대한 두 날개를 쫙 펼쳤다.
"나의 이름은 '켈로르(Kelore)'다. 똑똑히 기억해주게!!!!"
파아앙-!! 그가 내 이름을 외치는 순간, 나는 그의 허리춤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바티칸 총사령부의 돔 천장을 부수고 우주 공간을 향해 맹렬하게 쏘아 올려졌다.
"이제부터 전투다!!!"
"네?! 가, 갑자기요?! 저 대천사 각하 뵈러 가는 거 아니었어요?!"
"정신 똑바로 차려!!!"
아니, 천사님! 아까까지 서류 작업하던 공무원 아니셨습니까! 방금 전까지 눈물 질찔 짜며 감동해 놓고, 왜 갑자기 전투 투입이냐고요!
콰아앙-!
나의 비명을 삼켜버리듯 시공간이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켈로르와 나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전장 한복판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켈로르는 나를 거친 잿빛 땅바닥에 휙 집어 던져놓고는, "엄호 부탁한다!"라는 말만 남긴 채 핏빛 하늘을 뒤덮은 악마들의 군단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가 버렸다.
"아, 진짜 이놈의 연옥은 중간이 없어! 이게 뭐야 이게... 성모님 살려주세욧 ㅠㅠ!"
나는 쏟아지는 유황불과 폭발을 피해 일단 그냥 앞으로,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무거운 20미리 묵주 기관포를 질질 끌면서. 사실 전술적인 후퇴라기보다는 숨을 곳도 없고 너무 당황해서 본능적으로 달린 것에 불과했다.
"키에에엑!"
그때, 먹구름 속에서 시꺼먼 악마 다섯 마리가 나를 발견하고 갈퀴를 세우며 급강하해 왔다.
"아오, 쫌! 악마다!"
나는 살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진흙탕에 슬라이딩하며 거대한 20미리 기관포의 양각대를 땅에 꽂았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방아쇠를 꽉 당겼다.
투두두두둥-!!!!
어깨가 빠질 듯한 엄청난 반동. 20단 치 기도가 압축된 성스러운 철갑탄이 불을 뿜으며 허공을 갈랐다.
퍼벙! 펑!
"어...?"
눈을 떠보니, 나를 덮치려던 악마 다섯 마리의 상반신이 글자 그대로 공중에서 지우개로 지운 듯 깔끔하게 증발해 있었다. 7급인지 8급인지 등급은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압도적인 화력이었다.
콰콰쾅!!!!
내가 묵주 기관포의 뽕맛(?)에 취하기도 전, 전장이 통째로 뒤집힐 듯한 거대한 지진이 발생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입이 떡 벌어졌다.
서울의 63빌딩만큼이나 거대한 실루엣들이 구름 위에서 뒤엉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5급 이상으로 추정되는 거대 악마들과 천사들이 치고받는 코스믹 호러적인 육탄전이었다.
"미친... 내가 낄 자리가 아니잖아, 여긴!"
하지만 내 시야에 방금 전 나를 이곳에 던져놓고 간 천사 '켈로르'가, 거대 악마의 거센 꼬리 치기에 맞아 중심을 잃고 추락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악마가 그 틈을 타 켈로르를 완전히 찢어버리려 달려들었다.
"이런 젠장... 도와야 해!"
나는 황급히 기관포의 총구를 위로 꺾어 올려, 저 거대한 악마의 시꺼먼 발목을 향해 정조준했다.
탕! 탕! 탕! 탕!
연사 속도는 굼벵이 같았지만, 20미리 묵주 철갑탄의 위력은 확실했다.
"크아아악!"
내 총알이 악마의 발목 관절을 정확히 타격하여 살점을 뜯어내자, 악마의 돌진 자세가 기우뚱하게 무너졌다.
켈로르는 내가 만든 그 찰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공중에서 날개를 비틀어 자세를 고쳐잡더니, 번개처럼 뻗어 나가 빛의 검으로 악마의 거대한 목을 단숨에 날려버렸다.
스르릉-! 거대한 악마의 몸통이 빛의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후우... 봤냐? 내가 바로 미카엘이다. 이 정도면 1인분 확실히 했지?"
나는 기관포의 뜨거운 총신을 쓰다듬으며 교만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 연옥에서 자만심은 죽음보다 더 빨리 청구서를 보내는 법이었다.
교만한 생각을 품자마자 하늘이 새카맣게 어두워졌다.
"어...?"
그것은 먹구름이 아니었다. 방금 켈로르가 목을 벤 악마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거대한 다른 악마의 발바닥이, 아주 작정하고 파리 잡듯 나의 머리 위로 똑바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악!!!!"
나는 기관포를 내팽개치고 바닥에 엎드려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이건 도망칠 수도 없는 완벽한 압사(壓死)의 궤적이었다.
"엄마아아아!"
눈을 꽉 감았다.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각오했다.
......
그런데, 1초가 지나고 3초가 지나도 악마의 발은 나를 짓밟지 않았다. 아무런 고통도, 진동도 없었다.
"뭐지...?"
나는 덜덜 떨며 웅크렸던 팔을 조금 풀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를 짓뭉개기 직전까지 다가왔던 거대한 악마의 발바닥은, 마치 동영상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허공에 멈춰있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시뮬레이션 종료!!!]
어디선가 뇌리를 직접 때리는 웅장한 기계음이 크게 울려 퍼졌다.
스스스슥- 기계음과 동시에, 나를 짓밟으려던 악마의 발도, 하늘을 뒤덮었던 핏빛 구름도, 부서지던 대지도 마치 낡은 폴리곤 그래픽이 깨지듯 모자이크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나의 두 번째 죽음, 아니, 끔찍했던 실전 전장이 통째로 증발해버린 것이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은 내 눈앞에, 다시 그 눈부시고 거대한 바티칸 총사령부의 홀로그램 지구본이 나타났다.
어느새 내 앞에는, 방금 전까지 시뮬레이션 속에서 목을 베고 날아다니던 7급 천사 켈로르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말끔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는 내가 팽개쳤던 무거운 20미리 묵주 기관포를 한 손으로 가볍게 주워 들며, 빙긋 웃었다.
"수고했다, 미카엘 제군."
그의 눈빛은 아까 행정실에서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던 그 모습과는 또 달랐다. 실전에서의 내 능력치를 냉정하게 평가하는, 노련한 지휘관의 눈빛이었다.
"자네의 숭고한 이타심은 이미 행정실에서 확인했네. 하지만 숭고한 마음만으로는 이 지독한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아니... 영혼들을 온전히 지켜낼 수 없지."
켈로르는 기관포를 자신의 등 뒤로 스르륵 넘겨 수납하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가 자네를 이 총사령부로 부른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자네의 그 무한한 묵주 탄창과 드론 전술... 그리고 방금 시뮬레이션에서 보여준, 두려움 속에서도 방아쇠를 당기는 그 기이한 생존 본능."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는 순간, 나는 이 7급 천사의 진짜 목적이 나를 칭찬하거나 위로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그리고 훨씬 더 위험한 전장으로 나를 끌어들일 작정이었다.
"이제 진짜 '대천사 각하'를 뵈러 가야 할 시간이다. 자네의 그 얄팍한 주둥이가 내뱉은 선언이... 이 연옥의 정체된 전선을 뚫을 새로운 창끝이 될 수 있을지, 그분께서 직접 판단하실 테니까."
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무시하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기... 천사님. 저 그냥 다시 명동 성당으로 돌아가서 청소부나 하면 안 될까요? 저기 강 신부님이랑 최 선배가 저 엄청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내 애절한 호소에도 켈로르는 그저 피식 웃으며 앞장서 걸을 뿐이었다.
천국은 없다고 선언해버린 하급 청소부와, 수천 년 만에 눈물을 흘린 전사 천사. 우리의 기묘한 동행은 그렇게, 바티칸 총사령부의 가장 깊고 비밀스러운 심장부를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나의 지독한 연옥 라이프는, 이제 막 튜토리얼을 끝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