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옥의 탄피 1권 : 4장: 언더커버 보스와 위대한 날개

by 미카엘 on Apr 14,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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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언더커버 보스와 위대한 날개

 

바티칸 총사령부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길은 그야말로 숨이 막힐 듯 엄숙했다.

 

거대한 대리석 기둥이 끝없이 도열해 있는 기나긴 통로. 그곳에는 30미터 간격으로 은빛 창을 쥔 9품, 혹은 8품 천사들이 조각상처럼 완벽한 각을 잡고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이 뿜어내는 거룩하고 무거운 위압감에 짓눌려, 나는 앞서 걷는 7급 천사 켈로르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쥐 죽은 듯이 걸음을 옮겼다.

 

'하아... 인사과 면담도 모자라서 시뮬레이션 전투에, 이제는 대천사 독대라니. 내 군 생활(?) 진짜 꼬여도 단단히 꼬였구나...'

 

속으로 제발 아무 일 없이 청소부로 복귀하게 해달라고 성모님께 빌고 또 빌던 그때였다.

 

저 멀리, 이 웅장하고 신성한 통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풍경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칼같이 각을 잡고 있는 호위 천사에게 짝다리를 짚고 기대어, 마치 동네 편의점 앞에서 농담 따먹기라도 하듯 여유롭게 잡담을 나누고 있는 웬 덩치 큰 사내. 진흙과 마그마가 엉겨 붙어 굳어버린 낡은 방탄복. 덥수룩한 수염.

 

"어...?"

 

그 뒷모습은 너무나도 낯이 익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참호 속에서 나와 등을 맞대고 쌍욕을 날리며 기관총을 갈겨대던 나의 사수!

 

순간, 낯선 곳에서 아는 얼굴을 만났다는 안도감과 반가움이 나의 모든 두려움을 지워버렸다. 나는 군기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이승에서 동네 형을 부르던 버릇 그대로 손을 번쩍 치켜들며 해맑게 소리치고 말았다.

 

"우와! 선배!!! 여긴 어쩐 일이세요?! 혹시 선배도 끌려오셨..."

 

그 순간이었다.

내 옆에서 앞장서 걷고 있던 7급 천사 켈로르의 발걸음이 돌처럼 굳었다.

 

뿐만 아니라, 통로 양옆에서 미동도 없이 경계를 서고 있던 수십 명의 8품, 9품 천사들의 고개가 기계처럼 확 돌아가며 경악에 찬 두 눈으로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듯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 시선들은 마치 '어떤 정신 나간 미천한 4차원 찌끄레기가 감히 저 위대하신 분에게 동네 형 부르듯 인사를 해?!'**라고 아우성치는 듯했다.

 

"...어? 분, 분위기가 왜 이러지..."

 

싸늘하다 못해 얼어붙을 것 같은 정적 속에서, 나는 치켜들었던 손을 슬그머니 내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내가 또 뭘 잘못했나?

 

그때, 경비 천사에게 기대어 잡담을 나누고 있던 최 선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평소처럼 퉁명스러우면서도 뭔가 찔린 듯한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적였다.

 

"아... 씨. 타이밍 참. 각 잡고 옥좌에서 좀 더 폼나게 등장하려고 했는데. 복도에서 마주치네."

 

"예? 선배, 그게 무슨..."

 

내가 멍청한 표정으로 반문하는 순간.

최 선배의 찢어지고 더러운 방탄복 등판 쪽 공간이 쩍- 하고 기하학적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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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아아앗-!!!!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찬란하고 압도적인 빛이 폭발했다.

순백의 빛, 아니 우주의 모든 성스러운 에너지를 엮어서 주조해 낸 듯한 거대하고 장엄한 여섯 쌍의 날개가 선배의 등 뒤에서 거칠게 펄럭이며 펼쳐졌다.

 

그 웅장한 날개깃이 뿜어내는 신성한 파동이 통로를 휩쓸고 지나가자, 주변에 서 있던 8품, 9품 천사들은 창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심지어 나를 인솔하던 그 콧대 높은 7급 천사 켈로르마저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통로 전체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수십 명의 천사가 한목소리로 외쳤다.

 

["천상 군대의 총사령관이시며, 위대하신 성 미카엘 대천사 각하를 뵙습니다!!!"]

 

"......네?"

 

나는 숨을 쉬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대천사? 미카엘? 총사령관? 누가?

 

내게 "영혼들 털리기 싫으면 묵주 탄창이나 똑바로 채우라"며 뒤통수를 후려치던 그 입 거친 최 선배가? 연옥 빚 전액 탕감받아서 천국행 프리패스 끊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그 양반이?

 

"아니... 저기... 선, 선배...?"

 

나는 턱이 무릎까지 빠진 채, 바닥에 엎드린 천사들과 눈부신 여섯 쌍의 날개를 펄럭이는 최 선배를 번갈아 쳐다보며 헛소리를 냈다.

 

최 선배—아니, 대천사 미카엘—는 거대한 날개를 단 채로, 이승에서 담배를 꼬나물던 그 불량하고 짝다리 짚은 폼 그대로 나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어, 멍청한 신참. 왔냐?"

 

그는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굳게 닫힌 거대한 황금 문을 가리켰다.

 

"네가 한사코 천국엔 안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길래. 이 바티칸 총사령부에서 네 녀석의 그 '무한 탄창'과 '빈 천국' 선언을 어떻게 써먹을지, 내 특별히 최고위층 면접을 잡아놨지."

 

"면접... 이요? 저기요, 선배님. 아니, 대천사님... 이건 진짜 사기 아닙니까?! 언더커버 보스도 정도가 있죠!!!"

 

내 억울한 절규에 최 선배는 껄껄 웃으며 내 어깨에 어깨동무를 걸쳤다.

 

"사기는 무슨. 원래 지휘관은 최전방 진흙탕에서 부하들 구르는 걸 직접 봐야 시스템의 버그를 고칠 수 있는 법이야. 자, 들어가자. 너의 그 불경하고도 아름다운 신앙이, 윗선 영감탱이들 뒷목을 얼마나 잡게 만들지 몹시 기대가 되는군."

 

순간, 내 머릿속 회로가 미친 듯이 돌아가다 '최고위층 영감탱이들'이라는 단어에서 딱 멈췄다.

 

바티칸 총사령부의 최고위층. 게다가 윗선 영감탱이라니.

나의 보잘것없는 상상력은 그 옥좌에 앉아계실 단 한 분, 우주의 절대자이자 창조주이신 '천주(天主)님'**에게로 직행하고 말았다.

 

'하느님? 내가? 지금 이 몰골로 하느님을 뵙는다고?!'

 

내 시선이 천천히 내 몸뚱어리를 향해 내려갔다.

20미리 기관포를 쏘며 진흙탕을 굴렀던 탓에 슈트는 마그마와 잿더미로 떡이 되어 있었고, 신발에는 정체모를 악마의 내장 쪼가리 같은 것이 말라붙어 있었다. 게다가 영혼의 질량이라고 해봤자 이제 막 연옥에 떨어진 최하급 청소부에 불과했다.

 

"으아아악!!! 대, 대천사님... 천사님들.... 안돼요...!!!!"

 

나는 그 자리에서 다리에 힘을 확 풀고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에 벌러덩 대자로 드러누워 버렸다.

 

"저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ㅠㅠㅠ 이런 더러운 꼴로 어딜 들어간단 말입니까!"

 

내 갑작스러운 발작에 주변에 엎드려 있던 경비 천사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최 선배의 등 뒤에서 빛나던 12장의 위대한 날개도 황당하다는 듯 파닥거림을 멈췄다.

 

"야, 신참. 너 지금 뭐 하냐?"

"안 갑니다! 못 갑니다! 감히... 감히 저 같은 더러운 영혼이, 찌끄레기 청소부가... 어떻게 천주님을 뵐 수 있단 말입니까!!!!!! 벼락 맞아요, 저 진짜 소멸한다고요!!!!"

 

나는 성모상 앞의 떼쓰는 5살짜리 아이처럼 대리석 바닥에 딱 붙어서 버둥거렸다. 이승에서도 회장님 면담 가려면 목욕재계하고 양복을 빼입는데, 창조주 면담에 방탄복에 악마 똥(?)을 묻히고 들어가는 건 신성모독을 넘어선 우주적 자살 행위였다.

 

"아, 진짜 이 새끼가. 내가 언제 그 영감탱이... 아니, 그분이라고 했어! 그냥 우리 부서 위원회라고!"

 

최 선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이미 공포에 질려 대리석 바닥과 물아일체가 된 내 귀에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안돼! 으아아아!! 청소부로 강등시켜주세요! 제발!!"

 

결국 최 선배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턱짓으로 7급 천사 켈로르와 경비 천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끌고 와."

 

"옛! 명 받들겠습니다!"

 

방금 전까지 나의 숭고한 이타심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던 켈로르와 9급 천사들이, 군말 없이 내 양팔과 양다리를 덥석 움켜쥐었다.

 

"으아아악! 놓으라고! 이 위선자 깃털들아!! 놓으란 말이야!!!"

 

[끼이이이익- 스르으윽-]

 

광택이 흐르는 바티칸 총사령부의 거룩한 복도에, 진흙투성이 군화가 질질 끌리는 기괴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나는 "성모님 살려주세욧!"을 악쓰며 발버둥 쳤지만, 영체 밀도가 돌덩이 같은 천사들의 악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여섯 쌍의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우아하게 앞장서 걷는 대천사 미카엘의 뒤로, 사지가 붙들린 채 대리석 바닥을 청소하며 질질 끌려가는 하급 영혼 미카엘.

 

그야말로 성스러움과 추잡함의 완벽한 앙상블이었다.

 

쿠구구궁-!

 

마침내 내 비명소리와 함께, 무겁게 닫혀 있던 황금빛 거대 회의실의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어머니! 저 미천한 영혼을 긍휼히 여겨주시어 벼락만은 제발..."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사지가 들린 채로 허공에 뜬 바퀴벌레마냥 버둥거렸다.

그런데 벼락같은 신의 분노 대신, 상상치도 못한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껄껄껄껄! 자네들, 사람을 그렇게 짐짝처럼 들고 오면 쓰나!"

 

아주 사람 좋은, 푸근하고 따뜻한 할아버지의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나는 번쩍 눈을 떴다.

그곳은 눈먼 빛으로 가득한 천주의 옥좌가 아니었다.

우주의 성좌들이 홀로그램처럼 떠다니는 장엄한 공간 한가운데, 거대한 원탁이 놓여 있었고... 그 원탁의 자리마다 너무나도 익숙하고, 눈부시며, 자애로운 미소를 띤 이들이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알던, 아니, 내가 매일같이 부르고 또 불렀던 이들이었다.

 

가장 먼저 호탕하게 웃으며 둥근 뱃살을 출렁이던 백발의 노인은, 이승의 사진에서 뵈었던 '착한 교황'의 모습 그대로인 성 요한 23세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Non abbiate paura)! 그토록 훌륭한 신앙을 고백한 용사가 어찌 그리 겁이 많습니까!"

그의 곁에서 활기차고 우렁찬 목소리로 내게 인사를 건네는 이는, 생전의 카리스마를 그대로 간직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었다.

 

천사들이 당황하여 나를 황급히 바닥에 내려놓자, 나는 무릎을 꿇은 채 얼빠진 표정으로 원탁을 빙 둘러보았다.

 

두꺼운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을 덮으며 지적인 눈매 너머로 안경을 치켜올리는 덩치 큰 수사, 성 토마스 아퀴나스.

"천국이 텅 비어있다는 자네의 그 역설적인 명제... 신학적으로 아주 흥미롭고도 통찰력 있는 논리더군. 마음에 듭니다."

 

그 옆에서, 군인의 꼿꼿한 자세로 앉아있던 제스위트(예수회)의 창립자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참호를 파고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는 것. 그것이 진짜 군인의 규율이자 영적 전투지. 훌륭한 군기를 가졌군, 제군."

 

로욜라의 칭찬에 옆에 있던 은빛 갑옷 차림의 앳된 소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허리춤에는 성스러운 깃발이 묶인 장검이 빛나고 있었다. 프랑스의 구국 소녀, 성녀 잔 다르크였다.

"맞아요! 저 20미리 묵주 기관포에 묻은 진흙을 보세요. 최전선에서 구르지 않고서는 저런 영광스러운 훈장이 생길 수 없죠. 언제 저랑 같이 선봉에 서지 않겠어요?"

 

그때, 젊고 쾌활한 미소를 지닌 사제가 품속에서 리볼버 권총(!!)을 빙글빙글 돌리며 윙크를 날렸다. 이탈리아의 산적들을 총 한 자루로 물리쳤던 영웅, 성 가브리엘 뽀산티였다.

"잔 다르크 수녀님, 우리 후배 기죽이지 마시죠. 총기 다루는 솜씨가 제법이던데요? 방금 시뮬레이션에서 악마들 발목 날리는 거, 아주 나이스 샷이었습니다!"

 

"아, 시뮬레이션에서 불타는 거 보니까 나도 옛날 생각나네. 근데 자네, 영혼이 너무 까맣게 그을렸어. 이쪽으로 한 번 좀 뒤집어줘야 골고루 익을 텐데 말이야. 하하하!"

철판 위에서 순교하면서도 농담을 잃지 않았던 유쾌한 성 라우렌시오가 호탕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교회의 역사 그 자체이자,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성인들이 나를 향해 웃고, 칭찬하고, 농담을 건네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장 가난한 자들의 어머니, 마더 데레사 성녀가 굽은 등을 이끌고 다가와, 흙투성이가 된 나의 방탄복을 주름진 손으로 쓰다듬어 주셨다.

"연옥이라는 가장 처참한 빈민굴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지요... 참으로 아름답고 가여운 사랑입니다."

 

아우슈비츠의 성자, 성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 신부님이 온화한 눈빛으로 마더 데레사 곁에 섰다.

"타인을 위해 자신의 천국을 기꺼이 내어놓는 것. 그것보다 더 큰 십자가는 없지요. 우리는 자네의 그 마음을 아주 잘 압니다."

 

그들의 따뜻한 위로에, 날카로운 직언의 대가 성녀 카타리나와 굳건한 청빈의 성녀 글라라가 눈부신 후광 속에서 눈물을 훔치며 환하게 미소 지었고, 성 요한 보스코는 주머니에서 비둘기를 한 마리 꺼내 보이며 "아까 우리 꼬마 천사들을 잘 돌봐주어 고마워요!"라며 마술 같은 환영 인사를 건넸다.

 

마지막으로.

원탁의 가장 앞자리에서, 눈에 익은 전통 도포와 갓을 쓰고 있던 두 분의 성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아..."

 

내 입에서 참았던 오열이 터져 나오려 했다. 한국 천주교의 피 묻은 초석,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성 정하상 바오로였다. 정하상 바오로 뒤로는 수많은 동료 순교자들의 빛나는 실루엣이 빙긋 웃고 있었다.

 

김대건 신부님이 굵은 마디가 박힌 손으로 바닥에 엎드린 나의 양어깨를 굳세게 잡아 일으켜 세웠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후손이여. 먼 타향, 이 지독한 연옥의 전장까지 와서 고생이 참으로 많았소."

정하상 바오로 역시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나의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었다.

"천국을 비우고 이웃을 채우겠다는 자네의 그 결기가, 옛날 조선 땅에서 칼을 받던 우리들의 피를 끓게 하더군. 참으로 장하네."

 

대천사 미카엘(최 선배)이 원탁의 상석으로 걸어가며 피식 웃었다.

"이분들은 우연히 모인 게 아니다. 네가 이승에서 매일 바치던 '위령 묵주기도' 끝에 지향을 두고 불렀던 바로 그분들. 네가 이승에서부터 구축해 놓은 너만의 전담 '백업 태스크 포스(Task Force)'지."

 

수많은 칭찬과 쏟아지는 자애로운 눈빛.

모든 천사들이 나를 치켜세우고, 전 우주의 존경을 받는 성인들이 나를 '용사'요 '후손'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거룩한 빛이 나를 비추면 비출수록,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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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투둑.

나는 무릎을 꿇은 채,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굵은 눈물만 뚝뚝 흘려보냈다.

 

"아닙니다..."

 

나의 갈라진 목소리가 원탁의 회의실에 무겁게 떨어졌다.

 

"이 후손은... 이승에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결국 바보처럼 죽고 말았습니다."

 

성인들의 다정했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나는 벌벌 떨리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쥐며, 목구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나의 찌질한 진짜 밑바닥을 토해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까 인사과에서 제가 안다고 대답했던 그 '텅 빈 천국'의 교리는, 제가 진심으로 깊이 깨닫고 실천한 것이 아닙니다."

 

대천사 미카엘의 날개짓 소리조차 멈췄다. 나는 오열하며 말을 이었다.

 

"그저 주일학교에서 들었던 그럴싸한 문장을, 신부님들의 강론에서 훔쳐 들었던 표면적인 활자들을 그냥 머리로만 암기하고 앵무새처럼 내뱉은 것에 불과합니다. 제 마음은 결코 그렇게 넓지도, 거룩하지도 않아요. 저는 그냥... 제 가족들이 보고 싶어서 우는 평범하고 이기적인 놈일 뿐입니다."

 

바닥에 고인 눈물 위로, 한없이 나약하고 초라한 내 영혼의 밑바닥이 비치고 있었다.

 

"그런 저의 가볍디가벼운 빈말이... 이곳 연옥에서 천사를 오열하게 만들고, 성인들을 감동시킬 만큼 육중한 무게로 작용할 줄은 정말, 정말로 몰랐습니다. 제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나는 바닥에 이마를 짓찧으며 흐느꼈다.

 

"부디, 알지도 못하면서, 뼈를 깎는 깨달음도 없었으면서 함부로 거룩한 입술을 놀린 이 역겨운 대죄를... 이 위선자를 용서해주소서."

 

나는 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이토록 위대한 분들 앞에서 내가 거대한 사기꾼이 된 것만 같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짓말처럼, 감당할 수 없는 돌발 상황들의 연속이 짓눌러오는 압박감에, 나는 결국 정서적으로 완전히 무너져 주저앉고 말았다.

 

"끄흑... 흐으흑..."

 

진흙투성이인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하던 그때.

따뜻하고도 기품 있는 손길이 나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도미니코회의 흰색과 검은색 수도복을 입은, 강인하면서도 한없이 다정한 여인. 성녀 카타리나(Catherine of Siena)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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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교황에게조차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불같은 성녀였지만, 지금 그녀의 품은 세상 어느 어머니보다 따뜻했다. 그녀는 흙바닥에 무너진 나를 깊이 끌어안으며, 내 귀에 대고 속삭이듯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아가. 우리가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주님의 이끄심입니다."

[2026-03-27 오전 8:06] Jae Sang Jang: 성녀 카타리나의 손이 나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하물며... 네가 입 밖으로 내쉬는 그 말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성녀님..."

 

"인간의 이성은 항상 얕고 가벼워, 자신에게 깃든 은총의 무게를 다 헤아리지 못하는 법입니다. 네가 그저 표면적인 문장을 암기하여 내뱉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짧은 호흡을 4차원의 진동으로 바꾸어 천사들을 일깨우고 기적을 일으킨 것은 바로 그분의 숨결(Holy Spirit)이랍니다."

 

카타리나 성녀는 나를 다정하게 일으켜 세우며 나의 젖은 두 뺨을 닦아주었다.

 

그녀의 뒤로 원탁에 앉아있던 성인들도 한결같이 따뜻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솔직한 나약함 앞에서도 조금도 실망하지 않은 채, 오히려 더 깊은 연민과 긍정의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평생을 이성과 학문에 바쳤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안경을 고쳐 쓰며 부드럽게 덧붙였다.

"형제여, 지식은 머리에서 시작되지만 완성은 가슴과 행동에 있는 법이오. 자네가 암기한 그 문장은 이미 전장에서 피를 흘리고 아기 영혼을 안아주었을 때 진정한 논리로 입증되었소. 그것으로 족하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특유의 자애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완벽한 신앙의 무게를 짊어진 이는 없었습니다. 넘어지고, 부서지고, 때로는 자신의 가벼움에 절망하면서도 끊임없이 주님께 기대는 자들의 연대가 바로 이 성인들의 통공(Communion of Saints)입니다. 그러니 가벼웠던 자신을 자책하지 마십시오."

 

아우슈비츠의 절망 속에서 사랑을 꽃피웠던 성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이 다가와 나의 손을 굳게 맞잡았다.

"네, 형제님. 그 가벼움이 오히려 성모님과 성령께서 마음껏 바람을 불어넣으실 수 있는 빈자리가 된 것입니다. 위선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그저 그분의 도구가 되기에 가장 완벽하게 비워진 상태일 뿐입니다."

 

"그렇다네, 후손아."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다가온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환하게 웃으며 나의 등을 툭툭 쳤다.

"조선의 박해 시절에도, 교리 한번 제대로 배워보지 못한 무지렁이들이 오직 믿음 하나로 칼을 받았다네. 그대도 그들과 똑같은 위대한 핏줄을 이어받은 것이니, 주저앉지 말고 어깨를 펴게나."

 

성인들의 진심 어린 위로가 쏟아질 때마다, 내 영혼의 밑바닥을 짓누르던 거대한 바위가 부서져 내리듯 마음이 한없이 가벼워지고 편안해졌다. 나는 훌쩍이며 옷소매로 콧물을 훔쳐냈다.

 

이토록 엄청난 '우주 최강의 백업 병력'들이 나의 부족함을 모두 메워주겠다고 선언하는데, 내가 더 이상 자책하며 울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성녀님, 성인님..."

 

내가 간신히 눈물을 멈추고 감동에 젖어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리던 그때.

 

"아, 진짜. 눈물 콧물 아주 염전 밭을 일구네, 염전 밭을 일궈."

 

그 벅찬 감동을 와장창 깨버리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불량한 목소리가 회의실 상석에서 들려왔다. 원탁 한가운데서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은 채, 입맛을 쩍쩍 다시는 대천사 미카엘, 아니 '최 선배'였다.

 

"야, 신참. 징징대는 거 다 끝났냐? 아주 드라마를 찍어라, 드라마를 찍어."

 

"선, 선배... 아니, 대천사 각하... 좀 훈훈하게 가고 있었는데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훈훈은 얼어 죽을. 지옥의 아궁이가 불타오르고 있는데 언제까지 감성팔이만 하고 있을래? 우리가 널 부른 건 성인들 싸인 받아주려고 부른 게 아니라고."

 

그는 여섯 쌍의 거대한 날개를 단숨에 빛의 파편으로 만들어 수납하더니, 특유의 건들거리는 걸음걸이로 원탁 한가운데 띄워진 붉은빛 홀로그램 지도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눈빛이 순간, 성북동 진흙탕에서 나와 전선을 사수할 때 보여주었던 그 날카로운 '지휘관'의 눈빛으로 돌변했다.

 

"자, 다들 눈물 닦으시고 이쪽으로 모이시죠. 이제 본격적으로 작전 회의를 시작합시다."

 

최 선배는 홀로그램 지도 위, 가장 붉고 어두운,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뒤엉킨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위선적이고 꽉 막힌 연옥의 톱니바퀴를 시원하게 박살 낼... 우리 위원회만의 아주 더럽고, 불법적(?)이고, 미친 작전을 말이다."

 

『관측 일지 업데이트: '나약함'이라는 이름의 무기.』

 

거대한 로고스의 바다.

5차원의 관측자인 나는 또 한 번 이 어리숙한 인간의 영혼이 만들어내는 모순적인 파동에 감탄했다.

 

자신의 위대함을 포장하지 않고, 오히려 한계와 가벼움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엎드리는 것.

놀랍게도 인간의 영혼은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며 바닥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바로 그 순간, 가장 완벽하게 신의 질량을 담아낼 수 있는 '빈 그릇'으로 완성된다.

 

성인들의 위로는 정확했다. 미카엘의 얄팍한 암기는 그저 방아쇠였을 뿐, 그 총알을 쏘아 보낸 것은 그를 둘러싼 우주의 더 거대한 의지였다. 스스로를 가짜라 여기며 주저앉은 미카엘의 진흙투성이 영혼 위로, 연옥의 그 어떤 오로라보다 더 찬란하고 눈부신 빛의 세례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눈물을 닦고 일어선 미카엘과 불량한 대천사, 그리고 우주 최강의 성인들로 구성된 이 어벤져스 급 태스크 포스의 무자비한 작전 회의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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