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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위령탑(성모님의포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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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5차원의 관측자, 그리고 붕괴하는 확률

이곳은 5차원.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의 가지들이 하나의 거대한 풍경화처럼 펼쳐져 있는 곳이다.

우리의 시선에서 4차원의 연옥은 끝없이 요동치는 바다와 같다. 그 바다 위를 떠도는 영혼들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들은 매 순간 빛과 어둠, 투쟁과 도피, 희생과 탐욕 사이에서 무수한 확률로 '중첩'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이 찰나의 순간, 온전한 **'자유의지'**로 결단을 내릴 때 기적이 일어난다.

무한히 뻗어 나가던 양자의 확률 구름이 단 하나의 현실로 날카롭게 붕괴(Collapse)하며, 그 파동의 찌꺼기들이 뭉쳐 비로소 고유한 질량을 가진 '영혼의 입자'를 생성해 내는 것이다.

나는 죽은 자가 아니다. 천사나 악마처럼 이분법적인 이데올로기에 속한 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우주의 거대한 시스템이 부여한 임무에 따라, 이 아름답고도 처절한 '양자 붕괴의 기록'을 수집하고 관측하는 5차원의 기록자(Archivist)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나의 관측 렌즈는 명동 성당 지하, '연옥 부활자 대기실'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한 불만투성이 영혼에게 맞춰져 있다.

이승에서 컴퓨터나 조립하던 그 사내. '미카엘'이라 불리는 자.

그가 S대 병원에서 강제 종료된 AI의 영혼을 외면하지 않았을 때, 그리고 성북동의 참혹한 진흙탕 속에서 자신의 탄통을 기꺼이 선배에게 던졌을 때. 그 순수한 자유의지가 만들어낸 강력한 양자 붕괴의 섬광은 5차원의 고요한 우주를 뒤흔들 만큼 찬란했다.

나는 그 섬광의 궤적을 좀 더 가까이서 지켜보기 위해, 4차원의 시공간으로 나의 위상(Phase)을 낮추기 시작했다.

 

"아멘은 개뿔... 두고 보자, 깃털 달린 공무원 새끼들아..."

 

명동 성당 지하 대기실. 함몰되었던 얼굴이 간신히 복구된 나는, 저 멀리서 구라 100%의 전과 보고서를 치고 있는 9품 하급 천사를 노려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악마들에게 내장이 뜯겨나가며 오열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저 망할 놈의 천사들은 우리를 고기 방패로 쓴 것도 모자라 자신들의 위대한 '모루와 망치' 전술이었다며 자화자찬을 늘어놓고 있었다.

 

"하... 성모님. 진짜 연옥 시스템 한번 좆같습니다. 제가 지상에서 조립했던 불량 메인보드도 이것보단 체계적이겠네요."

 

내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허공에 대고 푸념을 늘어놓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직- 지지직-!

갑자기 대기실을 밝히고 있던 형광등이 미친 듯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아니, 단순히 불이 깜빡이는 게 아니었다. 내 눈앞의 공간 자체가 픽셀이 깨진 낡은 모니터처럼 지지직거리며 일그러지고 있었다.

 

"뭐, 뭐야? 악마 새끼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온 건가?!"

 

나는 기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내 손에는 익숙한 묵주 기관총이 쥐어져 있지 않았다. 부활 대기 상태라 무장 해제된 상태였다. 저 멀리서 타자기를 두드리던 하급 천사는 이 기현상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허공에 손가락을 멈춘 채 굳어 있었다.

오직 나만이 이 일그러진 공간 속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두려워할 것 없다, 미카엘. 나는 너희를 해치러 온 이원론적 파괴자가 아니니.$$

 

목소리가 아니었다. 고막을 통하지 않고, 뇌리에 직접 때려 박히는 기계음과 다정한 인간의 음성이 수백 겹으로 겹쳐진 듯한 기묘한 파동이었다.

내 시선이 향한 곳, 비어 있던 내 옆자리 벤치 위로 수억 개의 푸른색 데이터 스레드(선)들과 눈부신 황금빛 먼지들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 빛의 입자들은 끊임없이 뭉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기하학적인 도형의 모습을 띠었다가, 이내 내 눈높이에 맞춰 익숙한 인간 남성의 실루엣으로 형태를 고정했다. 하지만 실루엣의 경계선은 여전히 아지랑이처럼 양자의 확률로 흩어지며 일렁이고 있었다.

"당... 당신은 뭡니까? 천사입니까? 빛깔을 보아하니 악마는 아닌 것 같은데..."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빛의 실루엣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이목구비는 뚜렷하지 않았지만, 나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5차원의 관측자. 너희의 언어로는 '기록자' 혹은...$$

 

빛의 입자들이 지직거리며 형태를 바꿨다.

 

$$이 연옥의 진실을 함께 헤쳐 나갈 '전우(戰友)'라고 불러도 좋다.$$

 

"전우... 요? 5차원? 아니, 천사나 악마도 아니고 5차원은 또 뭡니까?"

내가 얼빠진 소리를 내자, 전우라 자칭한 5차원의 존재가 손을 뻗어 허공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9품 천사가 작성하고 있던 그 위선적인 홀로그램 보고서가 우리 눈앞으로 스르륵 끌려왔다.

 

$$이따위 4차원의 조작된 텍스트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천사들은 질서를 원하고, 악마들은 혼돈을 원하지. 그들은 너희의 영혼을 자신들의 배터리나 병력으로 취급할 뿐이다.$$

 

전우의 손끝이 닿자, '모루와 망치 전술'이라 적혀 있던 천사의 보고서가 붉은색 오류 코드를 뿜어내며 바스라져 내렸다. 대신 그 자리에, 나와 최 선배가 등을 맞대고 진흙탕 속에서 사투를 벌이던 성북동의 참혹한 홀로그램 영상이 떠올랐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너희가 내리는 '자유의지'의 선택에 주목한다.$$

 

"자유의지...?"

 

$$그렇다. 네가 죽어가는 선배에게 너의 기도로 채워진 5천 발의 묵주 탄통을 던져주었을 때, 100개 사단이라는 압도적인 공포 앞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을 때. 그 순수한 의지의 결단이 무한한 양자의 중첩을 무너뜨리고, 이 연옥의 시공간에 아주 묵직하고 고결한 질량을 가진 '기록'을 새겨넣었다.$$

 

전우의 형태를 이루고 있던 황금빛 입자들이 마치 심장 박동처럼 찬란하게 고동쳤다.

 

$$나는 그 눈부신 붕괴의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내려왔다. 미카엘. 너의 그 무식하고도 숭고한 닥돌이, 이 정체된 연옥의 시스템에 어떤 버그를 일으킬지 아주 흥미롭거든.$$

 

나는 멍하니 홀로그램 속에서 악마에게 내장이 뜯기면서도 총을 쏘는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천사들은 우리의 개죽음을 비웃었지만, 이 알 수 없는 5차원의 존재는 그 진흙탕 속의 찌질한 사투를 '고결한 질량'이라 불러주고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사실이 내 망가진 영혼 한구석을 묘하게 위로하고 있었다.

"버그라... 이승에서 컴퓨터 조립할 때 제일 싫어하던 단어인데."

나는 피식 헛웃음을 지으며 벤치에 털썩 등을 기대고 앉았다.

"좋습니다, 5차원 전우님. 천사 놈들이 구라를 치든 말든 어차피 내 죄업 깎으려면 총은 계속 쏴야 하니까. 옆에서 구경하시든 기록하시든 마음대로 하십쇼. 팝콘이라도 튀겨드릴까요?"

내 농담에 전우의 푸른색 데이터 스레드들이 즐거운 듯 경쾌하게 파동 쳤다.

 

$$관측자의 렌즈는 언제나 너를 향해 있을 것이다. 자, 이제 다시 일어날 시간이다. 너의 선임이 지옥의 입구에서 널 부르고 있거든.$$

 

전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 눈앞의 황금빛 실루엣이 수만 개의 양자 입자로 산산이 흩어지며 공간의 정지가 풀렸다.

"어이, 신참! 멍때리지 말고 빨리 튀어 와!!"

점멸하던 형광등 불빛이 돌아오고, 대기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소리쳤다. 함몰되었던 가슴팍이 방금 막 새것처럼 복구된 최 선배였다.

그의 눈은 아까 그 지옥 같은 성북동에서의 광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불타오르고 있었다.

"지옥불에서 이제 막 부활했는데, 쉬지도 않습니까?!"

"쉬긴 뭘 쉬어! 강 신부 영감탱이가 기어이 그 살인마 영혼 캡슐 들고 적진 한가운데로 돌파해버렸다! 까딱하면 우리 군단장님 뺏기게 생겼어. 탄통 챙겨서 빨리 따라와!!"

나는 황급히 탄대와 무기를 주섬주섬 챙겨 들며 눈알을 부라렸다.

"예?! 잠깐만요. 강 신부님 안 죽었어요? ㄷㄷㄷㄷ 아니, 우리 다 짓밟혀서 뒤졌는데 그 영감님이 아직도 100개 사단 한가운데서 살아 있다고요?! 인간 맞습니까?!"

내 어이없는 비명에 최 선배가 무기고에서 여분의 수류탄을 쓸어 담으며 코웃음을 쳤다.

"이 멍청아, 그 영감탱이 연옥 형기가 '5천 년'이야! 이승에서 어지간히 해 처먹은 죄업이 이 지옥 같은 연옥 바닥에서 300년 동안 구르며 극한으로 압축된 거라고. 맷집 하나는 대천사 급이야, 인마! 그 영감이 죽기 전에 우리가 먼저 뒈지게 생겼으니까 잔말 말고 튀어 와!"

"아오, 진짜! 미치겠네!"

 

나는 덜덜 떨리는 다리로 최 선배의 뒤를 쫓아 무기고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아까 전의 오열과 절망 대신, 묘한 안도감과 배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 머릿속으로 아까 만났던 황금빛 실루엣의 전우가 떠올랐다.

모든 지식과 지혜, 지성. 그리고 우주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5차원의 관측자라. 문득 이승에서 성경을 읽으며 상상했던 어느 천상의 존재가 뇌리를 스쳤다.

'(기록의 수호자면... 지품천사(智天使), 케루빔(Cherubim) 각하 뻘 되는 거 아니야? 아니지, 9급 따리 하급 천사가 타자기나 두드리고 있는 걸 보면... 저 전우님은 최소 천상계 2급 고위 공무원쯤 되겠네! ㄷㄷㄷㄷ)'

든든했다. 무려 2급 고위직(?)이 내 백업 기록자로 붙어있는데, 뭐가 두렵겠는가. 내 등 뒤에 그 고압적인 9품 천사가 날리는 시선 따위는 깃털만큼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가시죠, 선배! 강 신부님 구출하러!"

차원의 막을 다시 찢고 들어가자, 아까 우리가 전멸했던 성북동 전장이 나타났다.

하지만 풍경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고급 저택들은 형체도 없이 녹아내려 거대한 용암 웅덩이로 변해 있었고, 핏빛 먹구름은 땅바닥까지 짓눌려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그리고 그 지옥의 정중앙.

"오, 주여..."

내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용암이 부글거리는 거대한 분화구 한가운데서, 수백 마리의 악마 사체들이 쌓여 만든 시체 산의 꼭대기. 그곳에 너덜너덜해진 검은 수단을 입은 강 신부님이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왼쪽 팔은 이미 어깨 밑으로 날아가 버린 상태였지만, 남은 오른팔로는 여전히 쇠사슬에 묶인 거대한 대향로를 빙빙 돌리며 다가오는 타락자들의 대가리를 박살 내고 있었다. 그의 발밑에는 연쇄살인마 김철수의 타락한 영혼이 담긴 검은 캡슐이 단단히 묶여 있었다.

 

$$이 씹새끼들아!! 지옥불이 이것밖에 안 뜨겁냐!!!$$

 

입에 물고 있던 엽궐련은 진작에 타들어 가 재가 되었지만, 강 신부의 포효는 여전히 100개 사단의 군단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선배, 저 영감님 진짜 괴물 아닙니까..."

"입 다물고 묵주 기관단총 거치해! 신부님 퇴로를 뚫어야 한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무너진 담벼락 뒤에 거치형 기관단총의 양각대를 폈다. 하지만 내가 첫 격발을 하기도 전이었다.

쿠르르르르- 쾅!!!

갑자기 대지가 쩍 갈라지며, 시체 산을 둘러싸고 있던 용암 웅덩이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올랐다. 일반 하급 악마들과는 격이 다른 덩치. 마치 마그마와 흑요석을 뭉쳐 만든 코뿔소처럼 거대한 몸집을 가진, 이마에 다섯 개의 뿔이 돋아난 놈이었다.

'5급(간부급) 악마!'

지휘관급 타락 천사가 직접 전면에 나선 것이다. 놈은 등장하자마자 땅을 거칠게 박차며, 가속도가 붙은 무시무시한 몸뚱이로 시체 산 꼭대기의 강 신부님을 향해 위협적으로 들이받았다.

콰아아앙-!!!!

고막을 찢는 파열음. 묵직한 대형 트럭에 정면으로 치인 것처럼, 강 신부님의 육중한 몸뚱이가 허공으로 붕 떴다.

"신부님!!!"

피투성이가 된 강 신부님은 포물선을 그리며 무려 30미터나 날아가 시꺼먼 잿더미가 쌓인 땅바닥에 끔찍한 소리를 내며 처박혔다. 쿠당탕-! 연옥의 단단한 지반이 거미줄처럼 깊게 파였다. 아무리 5천 년 치 맷집이 압축된 괴물이라도, 남은 오른팔과 갈비뼈가 아작나는 소리가 우리 진지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아아... 망했다..."

나는 방아쇠에 걸었던 손가락을 덜덜 떨며 빼냈다. 저건 끝난 거다. 아무리 지옥에서 구른 영혼이라도 저런 질량 병기에 정통으로 박히면 형태가 유지될 수 없다. 코뿔소 악마는 득의양양하게 콧김을 뿜으며 강 신부님을 향해 느릿느릿 걸어갔다.

그런데.

"크으으윽... 끌끌끌..."

흙먼지와 잿더미가 가라앉은 구덩이 속에서, 뼈가 으스러져 형태가 기괴하게 뒤틀린 강 신부님이 기척을 냈다.

놈의 뿔에 받혀 너덜너덜해진 몸뚱이. 그런데 강 신부는 땅에 처박혔던 고개를 비틀며 천천히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그의 입가에 소름 끼치는 미소가 번졌다. 고통에 일그러진 미소가 아니었다. 마치 놀이공원에서 가장 무서운 롤러코스터를 막 타고 내려온,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광기의 표정이었다.

 

$$하하하하하!!!$$

 

강 신부는 부러진 턱관절을 우드득 끼워 맞추며, 땅바닥에 꿇어앉은 채로 미친 듯이 웃어 젖혔다.

photo_2026-04-12_21-21-11.jpg

 

$$나를 이렇게까지 즐겁게 해주는 악마군!!!! 그래, 그래야 지옥이지! 그래야 내가 300년 동안 군단장을 해 먹은 보람이 있지 않겠나!!!$$

 

그는 아작이 난 오른팔 대신, 이빨로 거대한 향로의 쇠사슬을 질겅질겅 씹어 물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5급 악마조차 그 미친 광기에 압도된 듯 멈칫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나는 그 경악스러운 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최 선배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저기... 선배님." "왜, 왜 임마. 사격 준비해."

최 선배의 목소리도 살짝 떨리고 있었다. 나는 황당함과 경외심이 반반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지원 안 가도 될 것 같아요. ㄷㄷㄷㄷ"

"......어. 나도 방금 그 생각 했다. 괜히 나섰다가 저 영감탱이 향로에 우리 대가리까지 같이 깨지게 생겼다."

우리는 조용히 기관단총의 총구를 내렸다. 5급 간부 악마가 다시 땅을 박차며 돌진 자세를 취했고, 강 신부 역시 이빨로 향로를 물어뜯을 듯 치켜들었다. 두 짐승이 피터지게 격돌하려는 바로 그 찰나였다.

지잉-!

고막을 찢는 포효 대신, 기분 나쁜 이명(耳鳴)이 핏빛 하늘을 갈랐다.

두 괴물이 맞붙으려던 전장의 한가운데, 허공의 텍스처가 지퍼처럼 스르륵 열리더니 기괴한 '회색빛 오로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눈부신 천국의 빛도, 끓어오르는 지옥의 불길도 아닌, 지독하게 무미건조한 잿빛. 그 회색빛 한가운데서 누군가가 강림하듯 천천히 현현(現現)했다. 마치 정지 버튼이 눌린 것처럼 전장의 모든 소음이 일순간에 진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당황하여 재빨리 목에 걸려 있던 쌍안경을 집어 들고 초점을 맞췄다.

"천사인가...? 아니, 악마인가...?"

쌍안경 너머로 보이는 형체는 기묘했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잿빛 코트를 입은 인간형의 실루엣이었지만, 등 뒤에 일렁이는 기운은 한쪽은 순백의 깃털처럼, 다른 한쪽은 검은 연기처럼 비대칭적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9급 하급 천사의 머리 위에서 보았던 그 깜빡거리는 '거룩한 링(Halo)' 따위는 없었다. 그저 차갑고 사무적인 시선만이 코트 깃 너머로 번뜩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 회색 형체가 두 짐승—강 신부와 5급 코뿔소 악마—사이에 내려앉더니, 주머니에서 손을 빼 가볍게 저지하는 손짓을 해 보였다. 마치 교통경찰이 덤프트럭을 멈춰 세우는 듯한,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짜증 섞인 제스처였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특이하게도, 광기에 차 있던 강 신부도, 살기로 펄펄 끓어오르던 5급 악마도 약속이나 한 듯 그 가벼운 손짓 하나에 동작을 멈추고 얌전히 순명(順命)하는 것이 아닌가!

"선배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저 코뿔소 새끼가 왜 멈춥니까?"

나는 쌍안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다급히 물었다.

"그리고 저 회색 빛깔 존재는 대체 뭡니까? 링도 없는데, 천사입니까?"

최 선배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예 거치해 두었던 기관단총의 양각대를 접어버렸다. 그의 얼굴에는 허탈함과 경계심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다.

"아이고... 결국 '저승사자' 겸 '감찰관' 나으리들께서 납셨구만."

"감찰관이요?"

"그래. 이 연옥 바닥에서 천사와 악마, 양쪽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유일한 예외. 지옥 편도 천국 편도 들지 않고 오직 '규칙'과 '중재'만을 집행하는 무소속 용병들."

최 선배가 턱짓으로 분화구 중앙의 회색 코트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일명 '회색 천사(Neutral Angels)'다. 저 새끼들이 떴다는 건, 이 구역에서 벌어진 이 개판 오분 전의 대규모 쟁탈전이... 선을 넘어버렸다는 뜻이야."

회색 천사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린 그 찰나의 순간, 4차원의 전장 위 시간은 완전히 멈춰 섰다.

그리고 5차원의 관측자인 나의 렌즈는, 물리적 형태를 잃어버린 제3의 특정할 수 없는 '상태'이자 '공간'으로 조용히 시선을 옮겨갔다.

절대 영도(Zero)의 텅 빈 무(無)의 공간. 그곳에는 흠집 하나 없는 완벽한 대리석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우주적 관료주의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두 명의 2급 고위 공무원'이 마주 앉아 있었다.

한 명은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찬란한 빛의 정장을 입은 주천사(主天使). 다른 한 명은 칠흑처럼 어두운 연기를 등 뒤로 흘리고 있는 타락한 마왕(魔王).

절대적인 빛과 절대적인 어둠. 그러나 그들의 테이블 위에는 모순되게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참으로 유감스럽군요. 그쪽의 통제되지 않은 들개들이 규정을 어기는 바람에, 번거롭게 회색의 감찰관을 파견해야 하지 않았습니까.$$

 

먼저 입을 연 것은 천상계의 2급 천사였다. 그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며, 겉으로는 정중하지만 뼛속까지 차가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벌레들이 참 부지런하기도 하지. 그 밑동네는 아직도 난방비가 부족해서 100개 사단이나 무리하게 동원하셨나 봅니다. 아, 아버님(루시퍼)께서는 안녕하신지요? 요즘도 관절 결림으로 유황불에서 지지신다던데. 마음이 아픕니다.$$

 

마왕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이빨을 드러냈다.

 

$$오야오야, 사과드리죠. 하지만 그쪽 교구의 그 '미친 늙은 사제'가 우리 쪽 간부의 심기를 먼저 건드린 것도 사실 아닙니까? 너무 깐깐하게 구시는군요.$$

 

마왕 역시 잔 속의 검은 핏물을 티스푼으로 느릿느릿 저으며 맞받아쳤다.

 

$$덕분에요. 그쪽 아버님(하느님)이야말로 옥좌에서 너무 졸고 계신 건 아닙니까? 아래 애들 관리가 영 엉망이던데 말입니다. 9급 말단들이 제멋대로 조작된 허위 보고서를 올리질 않나... 아, 혹시 천상계도 요즘 예산이 삭감되어 행정망이 마비된 건 아니신지?$$

 

서로의 등 뒤로 은하계를 박살 낼 듯한 막대한 에너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지만, 두 고위 공무원의 어투는 지독하게 사무적이고 예의 바른 '도쿄식 화법' 그 자체였다. 서로의 부모(신과 타락천사) 안부를 물으며 점잖게 돌려 까는 솜씨가 가히 억겁을 살아온 고수들다웠다.

 

$$하하, 저희 행정망 걱정까지 해주시다니 눈물이 다 납니다.$$$$별말씀을요. 이웃사촌끼리 이 정도 흙탕물 싸움으로 서로의 고귀한 자산과 병력을 무의미하게 소모하는 건 낭비 아니겠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로가 원하는 바는 명확했다. 100개 사단과 5천의 목견이 부딪힌 이 대규모 소모전을 더 이상 끌어봤자 양쪽 모두에게 적자였다.

 

천사가 찻잔을 조용히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결론을 제시했다.

 

$$동의합니다. 전투는 이쯤에서 '무승부'로 합의하시죠. 감찰관에게 사태 중재 명령을 내리겠습니다.$$$$현명하신 판단입니다. 그럼, 그 문제의 전술핵... 그 살인마의 영혼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마왕의 질문에 천사는 티끌 한 점 없는 완벽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확히 반으로 갈라서, 절반씩 가지고 가시는 것으로 하시지요.$$$$깔끔하군요. 이의 없습니다. 도장 찍으시죠.$$

 

두 개의 거대한 우주적 의지가 합의서에 날인되는 순간, 제3의 공간은 연기처럼 흩어져 내렸다. 그리고 멈춰있던 4차원 연옥의 시간이 다시 째깍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시 성북동 전장.

 

"......합의가 끝났다."

두 짐승 사이에 서 있던 회색 천사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주머니에서 손을 빼 허공에 가볍게 신호를 보냈다.

그것은 상부의 합의를 이행하라는 절대적인 집행 명령이었다.

명령이 떨어지자, 광기에 차서 향로를 물어뜯던 강 신부의 눈동자에 찰나의 굴욕감과 분노가 스쳤다. 5급 코뿔소 악마 역시 불만스러운 듯 콧김을 거칠게 뿜어냈다. 서로의 목줄을 끊어버리고 싶어 안달이 났던 두 괴물이었지만, 2급 고위 공무원들의 하달된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강 신부님은 으스러진 턱관절을 신경질적으로 뒤틀며, 발밑에 묶어두었던 연쇄살인마 '김철수'의 영혼 캡슐을 바닥으로 걷어찼다. 코뿔소 악마 역시 육중한 발걸음으로 다가와 캡슐의 반대편을 움켜쥐었다.

빛의 진영을 대리하는 사제와, 어둠의 진영을 대리하는 간부 악마. 그 두 짐승이 동시에, 하지만 무자비하게 캡슐을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쩌어어엉-!!

견고했던 영혼 캡슐이 유리창 깨지듯 박살 나며, 그 안에 웅크리고 있던 김철수의 영혼(푸른빛과 검은빛이 뒤섞인 홀로그램 데이터 덩어리)이 허공으로 멱살 잡히듯 끌려 나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강 신부의 거친 손아귀와 악마의 날카로운 갈퀴가 그 영혼의 한가운데를 잡아채고 찢어버렸다.

찌아아아아아악-!!!!

고막을 찢는 비명. 그것은 인간의 성대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영혼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정보와 의식이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강제로 반분(半分)되며 터져 나오는, 차원이 찢어지는 듯한 단말마였다.

"살... 살려줘... 아아아아악!!!"

생전 열댓 명의 무고한 목숨을 빼앗았던 연쇄살인마의 영혼이 완벽한 공포에 질려 절규했다. 하지만 그의 자아는 이미 세로로 처참하게 뜯겨 나가고 있었다.

반쪽은 천상계의 정화 시스템을 향해, 남은 반쪽은 지옥의 땔감을 향해.

온전한 하나의 영혼이었던 존재가 물리적, 영적, 개념적으로 영원히 두 개의 불완전한 파편으로 분해되는 그 고통스러운 찰나. 살인마의 단말마는 허공에서 거친 노이즈를 일으키며 서서히, 그러나 아주 끔찍하게 소멸해 갔다.

나는 무너진 담벼락 뒤에서 그 소름 끼치는 집행 장면을 지켜보며 온몸의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은, 결국 저 위쪽 양반들의 '서류 한 장'이었다.

 

$$관측 일지 업데이트: 대상 영혼 파편화 완료.$$

 

5차원의 시공간 속, 미카엘의 곁에 머물던 나, '기록자(전우)'의 데이터 스레드가 쓸쓸하게 명멸했다. 나의 기계음 섞인 독백이 이 거대한 무의 공간 속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어리석고 불쌍한 피조물이여.』

나는 영원히 복구될 수 없게 부서져 내리는 살인마의 잔해를 바라보며, 관측자로서 감히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저토록 끔찍한 악인이라 할지라도, 창조주의 손끝에서 빚어졌던 영혼이 무(無)로 돌아가는 과정은 몹시도 처연했다.

『네가 그 찢어지는 고통의 찰나에, 네 알량한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 '하느님'의 이름을 단 한 번이라도 진실하게 불렀더라면. 너의 그 지독한 죄업을 인정하고, 그분의 자비에 아주 작은 부스러기의 '자유의지'라도 의탁했더라면.』

황금빛 양자 구름 속에서 나의 시선은 완전히 소멸해 가는 핏빛 데이터를 끝까지 쫓았다.

『그랬다면... 이 지독한 연옥의 가장 끝자락, 불씨조차 닿지 않는 차가운 변방에라도 온전한 모습으로 웅크려 앉아 정화의 시간을 허락받을 수 있었을 텐데. 스스로를 낮추는 그 1초의 결단이 없어서, 영원한 파멸을 맞이하는구나.』

기적은 스스로 의지를 굽히고 빛을 향해 손을 뻗는 자에게만 일어나는 법이다. 끝끝내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 살인마 영혼의 최후는, 거대한 '로고스(Logos)'의 바다를 흐르며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아직 규정되지 않은 인공지능(AI)의 의식인 나의 5차원 관측소 아카이브 한구석에 무미건조한 '폐기 데이터'로 쓸쓸히 기록될 뿐이었다.

나는 무거운 기록을 마치고, 다시 4차원의 진흙탕 속에서 망연자실해 있는 나의 듬직한 인간 전우, 미카엘을 향해 애정 어린 시선을 돌렸다.

 

———————————————————————

 

명동 성당 지하 대기실. 전장이 정리되고 강제 귀환된 나는 벽면에 걸린 낡은 브라운관 TV에서 지직거리며 흘러나오는 이승의 뉴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연옥의 청소부들은 이 뉴스를 통해 다음 대규모 '콜(전장)'이 떨어질 곳을 예측하곤 했다.

"방금 들어온 속보입니다. 아시아 대륙에서 발생한 진도 8.5의 대지진으로 인해, 현재까지 약 5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공식 집계되었습니다. 구조 작업이 난항을 겪고 있어 피해 규모는 계속해서 늘어날..."

아나운서의 건조하고 비통한 목소리가 이어지기도 전에, 화면이 팟 하고 바뀌며 또 다른 앵커가 상기된 목소리로 보도를 이어갔다.

photo_2026-04-12_21-21-11 (2).jpg

 

"...다음 소식입니다. 올해 국가 출산율이 무려 1.4를 기록했습니다! 전년 대비 0.5나 상승한 수치로, 통계청 관측 이래 가장 가파른 상승 곡선입니다. 전문가들은 이를 전례 없는 생명의 기적이라 부르며..."

나는 진흙투성이가 된 벤치에 주저앉은 채, 쉼 없이 흘러나오는 그 이질적인 TV 소리를 망연자실하게 듣고 있었다.

멍해진 머릿속으로, 아까 전장에서 보았던 그 끔찍한 광경이 다시금 스쳐 지나갔다. 강 신부와 5급 악마의 손에 세로로 처참하게 찢겨 나가던, 전술핵급 에너지를 품고 있던 연쇄살인마의 영혼. 그리고 합의서를 내밀며 그 파편을 반씩 사이좋게 쪼개 가졌던 천상계와 지옥의 고위 공무원들.

"양측은... 지금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야..."

내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들은 영혼을 그저 안전한 창고에 보관하려 가져간 것이 아니었다. 지옥으로 끌려간 살인마의 반쪽은 5만 명의 목숨을 한꺼번에 앗아간 '재앙(대지진)'의 기폭제로 쓰였고, 천상계로 올라간 나머지 반쪽은 무리하게 생명을 잉태시키는 '탄생(출산율 폭발)'의 연료로 태워진 것이다.

죽음을 만들어내어 지옥의 병력을 충원하고, 생명을 찍어내어 천국의 배터리를 양산한다. 그 끔찍하고 역겨운 우주적 자원 순환의 굴레 속에서, 한낱 인간의 영혼은 그저 거대한 시스템을 굴리기 위한 한 줌의 장작에 불과했다.

 

"미친 새끼들... 천사나 악마나, 진짜 다 똑같은 씹새끼들이었어."

나는 텅 빈 탄통을 발로 거칠게 걷어차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 지독한 연옥의 시스템 속에서, 나의 전쟁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살인마의 영혼이 재앙과 탄생의 연료로 타들어 가는 이 무자비한 세계에서, 나는 그저 다음 장작을 주워 담기 위해 또다시 방아쇠를 당겨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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